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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섬세한 도슨트를 듣고 햇살 내리쬐는 낯선 거리를 걸은 후였다. 그동안 제법 열심히 귀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달마다 보험료를 얼마 내는지, 양꼬치에 산초를 얼마큼 뿌리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는지, 얼굴 어디에 점이 있는지, 내일 뭘 할 건지, 방금 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게 되었다. 살았던 동네의 모습, 아버지가 위스키를 즐기신다는 것, 선호하는 음악, 요즘 보는 드라마, 몸무게, 술버릇, 관찰하고 계획하는 진지한 눈빛, 형제와 친한 친구들의 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애인과의 기념일이 언제인지도 안다. 그는 쌍꺼풀이 짙은 나에게 술을 따르며 외까풀을 좋아한다고 했다. 외까풀 눈매를 가진 모든 이가 갑자기 너무 예뻐 보였다. 그는 절대 하지..
오랜만에 찬과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무거운 짐수레를 끄는 느낌이었다. 수레는 가끔 움직였다. 나는 그를 보았다. 모자에 가린 얼굴 윤곽만 비칠 뿐이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음식이나 컵을 봤다. 더 이상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앞에 있으면 쳐다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냐는 생각도 그만뒀다.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았을까? 미움이나 원망은 이미 지나갔다. 종종 그를 필요로 하지만 요구가 전부 충족되냐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원하는 게 없다(뿌옇게 바라는 건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한데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슬픈 사건을 더해서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기...?). 잦은 부딪힘 속에서 당위성을 먼저 버렸다. 어떤 게 사랑하는 것이고 어떤 게 헤어질 만한 것인..
오래전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나는 뭘까 궁금했지만, 질문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으므로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을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아픈 낌새가 보였다. 괜찮아지길 바라는 건 기적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초대에 응하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을 종이에 쓰는 상상을 했다. 실제로 한 일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것이다. 신기루 같았다. 많은 시간과 돈과 마음을 쓰고도, 흔적이 없었다. 하지 않을 일에는 절로 얕아지게 된다. 그가 말을 걸어오자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아직 기다리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스터디를 시작하기로 했다. 자신을 잘 돌보고 일상을 잘 영위하는 데에 힘쓸 것이다. 아픔은 가셔야겠지만.
며칠 전부터 속이 부대껴 엄마가 호박죽을 쒀 주셨다. 서울로 돌아와서 그걸 냉장고에 넣고 나갔다. 속이 안 좋아서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약속을 청했고 나도 늘 그랬듯 마지못해 응했다. 홀가분했다. 이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정리에 힘을 쏟았던가. 이젠 평정심을 찾았고, 해야 하는 행동을 명확하게 알았다. 각본대로 하면 되었다. 안전한 즐거움이 확보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찼다. 그를 구경했다. 그를 구경하는 나를 관찰했다. 술이 들어가니 금방 메스꺼워졌다. 들었고, 지켜보았고, 맞장구쳤다. 오래는 못 있겠다 싶어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가게를 나서니 갑자기 눈이 펑펑 왔다. 센티해졌다. 눈 맞으며 따라 걸었더니 언제 그런 곳을 찾았는지 멋진 와인바가 나..
상담 선생님은 자존심이 상해서라고 하셨다. 내 마음을 정하는 게 우선이라고 하셨다. 할 수 있는 행동 옵션들을 나열해 놓고, 각각을 비교해 보았다. 그중에 몹시 원하는 게 있었는데, 절대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마음마저 부정했다. 선생님과 내가 최종 선택한 옵션은 이제껏 해 오던 행동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자기 친구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듣다 보니 그 친구와 그의 관계는 나와 그의 관계와 다르지 않았다. 망설여졌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고, 최선의 대처를 하고 있다는 걸 확인받았음에도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좀 더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도 피하지 않았다.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고 누가 먼저랄..
이쪽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만난 선배들이 그랬다. 남자 친구 있으면 헤어질 수도 있다고. 웃어넘겼지만 진짜 첫 상담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그와 헤어졌다. 다시 상담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오늘 새벽 3시 반에 가지 말라는 말을 뒤로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기침이 나왔지만 속은 시원했다. 말렸다면 참았을 텐데 엉겁결의 독려에 내뱉은 "넌 진짜 자기중심적이야." 때문이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혼자 있고 싶다는 그 전의 말을 철회하고 날 붙잡았다. 우리가 어떤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의 자기중심성 앞에서 드디어 의견의 합치를 본 것이었다. 그동안 결핍되었다고 느낀 것, 이해하려 애썼던 것, 나의 문제로 돌렸던 것들이 실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환경이 척박하니 ..
내담자가 묻는다. 선생님,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냥 너무 좋아요. 하면 안 되는 거 아는 것도 제 자신이고 너무 좋아하는 것도 제 자신이라면 저는 누구인가요. 좋은데, 좋은 게 막 느껴지는데, 그게 어떻게 나쁠 수가 있나요. 이걸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요? 우리 모두 어차피 우주의 먼지 아닌가요. 예전의 나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선을 정해 놓으세요. 그 선을 넘으면 그만두는 겁니다. 하지만 선 안에서 자신이 보호받고 있는지 면밀히 확인하면서 즐거움도 추구할 수 있다면 누리세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즐기는 건 생각보다 머리 아픈 일일 거예요. 좋은 기분보다 중요한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제는 없다. 내가 변했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