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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C가 멋지다고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오늘은 가까스로 잡은 C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그동안 평소처럼 일했다. 일하다가 의문점이 있으면 C를 찾았고 C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C는 직무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다정했다. 나는 그와 소통했지만 그는 나 같은 몇 십 명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직무였다. 그를 조망하기 어려웠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걸 제시할 수 있기에 그에게 보여 줄 게 없었다. 우리가 함께 어떤 행사에 참여할 확률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그와 만날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C가 드디어 일정을 조정하여 나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원한 건 낮과 커피가 아니라 밤과 술이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을 확정한 그날부터 퇴..
이런 사진을 보내니까 곧바로 전화가 왔다. 그의 관심과 걱정은 상식적으로 완전히 이해된다. 그의 장난은 시기적절하며 적합하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의 마음은 알겠다. 안다고 자꾸 믿게 된다. 침대 위라는 목소리는 나른했다. 처음 와 본 장소에서 새 보금자리를 구해야 하는 날이 선 나와 대조되는 텐션이었다. 덕분에 차분해졌다. 우리는 머리를 뒤로 하고 웃어젖혔다. 그는 내가 보인다고 말했다. 나도 그가 보였다. 때때로 얽히고설키고 잊고 떠올리고 무거워졌다 가벼워졌다 하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절대 나누지 않지만, 무슨 말을 해야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앞날의 모름을 같이 지켜봐 주고 궁금해하는 그가 있어서 진정으로 위안이 되었다. 멀리 있지만 여전히 그날처럼..
일분일초 빨리 자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내가 써야 할 글은 일기가 아니라 보고서라는 것도 알지만 오늘 정말 즐거운 일이 있어 소회를 남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찬과는 무려 연애 3주년을 맞아 기념했다. 그도 나도 누군가와의 3주년은 처음이었다. 찬은 이전 나의 최장기 연애 기간이 2년 11개월인 걸 듣고 자신이 이겼다고 표현했지만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찬과는 기대를 다 내려놓은 바로 지금이 가장 순탄하다. 그는 더 이상 날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저녁을 먹으러 지하철을 타고 나가다가 오랜만에 크게 다퉜는데, 내가 제기한 문제점을 이해한 그는 다음 날 바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눈이 띄는 변화는 처음이었다.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그에..
'i(소문자 아이) 모임'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있다. 내향인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모인 것으로 여건 상 홍대, 합정 일대에서 만나지만 i답게 조용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모임의 성공 여부가 조용한 장소를 찾냐, 못 찾냐라서 그런 곳을 찾게 되면 헤어지는 순간까지 조용한 곳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을 남기느라 바쁘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도 홍대, 합정에서 기어코 조용한 데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모임에서는 이야기를 혼자 길게 끌고 가는 사람이 없다. 질문을 하면 다들 먼저 대답하라고 상대에게 손짓한다. 대답을 한 사람은 몇 마디만 하고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내향인도 종류가 다양하다.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 있고, 말하는 것보다..
고생 끝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단 3페이지 빼고 모두 작성해서 냈다. 이제 그 3페이지만 완성하면 이 고행이 끝나는데, 해방감을 다소 미리 맛본 나는 계속 미뤘다. 책을 읽고, 정성스럽게 태블릿에 필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평소엔 하지 않는 일까지 했다. 바로 웹툰 보기. 보게 된 계기는 잊었고 처음엔 최근에 나온 외전을 몇 편 보았다. 주인공이 결혼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결말을 보니 과정이 궁금해져서 아주 밤새 정주행을 하게 되었다. 한참 봤지만 아직 주인공이 누구랑 결혼한 건지 확신이 안 선 가운데 중도에 휴대폰을 닫은 것은 나도 모르게 응원하던 남주를 여주가 차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녀석 때문에 한참 울기까지 했다. 머리로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포르노와 다름 없으며 뻔뻔하고 작위적이라고 생..
연락이 없다. 데이트하는 날인가 보다. 연락 오면 산 정상의 풍경을 보여 주려 했다. 산의 시원한 조망을 좋아했던 것 같아서. 그리고 내가 멀쩡하고 건강하고 부지런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대신 양껏 짧은 옷을 입고 따뜻한 봄 날씨를 만끽하러 나갔다. 무릎보다 긴 타이즈를 처음 신어 보았다. 요즘엔 체형을 신경 쓰지 않고 옷을 입는다. 어떻게 보이든 내가 나라는 증명이 필요하다. 언젠가 길 가던 이의 오버니삭스가 마음에 들어 옆의 애인에게 말했더니 오타쿠 복장 같다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오늘 나는 오타쿠였다. 다행히 Y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Y는 내 외양에 관심이 없고 그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를 보고 어떤 토론 주제가 떠올랐다. 다소 긴박하고 날카롭게 Y에게 그 얘길..
이번 달부터 일을 다시 시작한다. 활동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담당자에게 보내고, 슈퍼바이저에게도 인사 메일을 드렸다. 어느덧 출근하지 않은지 세 달차에 접어 들었다. 그동안 책과 영화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었다. 한눈 팔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병원에 꾸준히 다닌 끝에 계획했던 치료 과정을 마쳤고 이후에 운동도 차차 시작하고 있다. 비록 다음 주에 작은 수술이 예정되어 있긴 해도 시간이 있으니 잘 마무리될 거라 여겨진다. 일을 하지 않아도 커리어가 멈추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공식적인 직함은 갖추어야 하고 거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깊이 있게 인간을 이해하는 토대 위에서 내담자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다양한 자격증을 찔러 보고, 그에 따른 다양한 수련 방식을 경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