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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10월. 낯설다. SNS에는 벌써 2023년 다이어리 광고가 뜬다. 오늘은 새 직장에 출근 2일 차였다. 3개월 조금 넘게 쉬다가 들어간 직장. 도보로 10분 거리이며(동료가 물으면 양심상 15분 걸린다고 말한다), 정말 하고 싶었던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온화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일품인 곳.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이름 앞에 '전문상담사'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 대학교 친구 하나는 밥상머리에서 "효율적으로 살 것"을 교육받았다고 하였다. 우리 부모님은 단 한 번도 '효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시지 않았으나 그 친구와 내가 친했던 건 내 삶의 방식이 본능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결과물을 내자'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진로를 결정하고도 전문성을 키우는 데에 너무 많은 비용..
졸업한 뒤에는 시험을 준비하는 게 아니고야 교재를 잘 안 보게 되었다. 한 번 훑었으니까 머릿속에 있으리라는 착각(소망?)과 (얼마나 봤다고) 반복이 불러오는 지루함이 싫어서였다. 그런데 어제 강의를 듣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교재를 폈다. 불안장애 파트를 다 보고 우울장애로 넘어갔다. 글자에 줄이 쳐 있을 뿐 확실히 머리에는 없었다. 이상심리학 교재를 처음 본 뇌를 구입한 듯 새롭고 신기한 내용들의 연속이었다. 우울장애는 더했다. 우울장애를 유발하는 역기능적 신념의 주제 두 가지는 '사회적 의존성'과 '자율성'이라고 한다. 이상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2017년의 나 또한 지금은 사라진 채도 낮은 주황색 필기구로 표시를 하며 생각했겠지. 이거 조심해야겠다고. Beck이 설명한 특수 상호작용 모델에 따르면..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독서 모임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밤새 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커뮤니티에서 영양가 없는 글을 읽다가 아침을 맞아버린 나는 친구가 출근 준비하는 시간에 눈을 감았다. 스팸 전화에 깼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파트타임 상담원으로 원서를 썼던 한 곳에서 서류 합격되었다는 문자와 함께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작성한 원서였건만 풀타임 일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기에 그 연락이 달갑지 않았다. 시간을 헛되이 왕창 썼다는 사실만 한 번 더 상기되었다. 강의도 들어야 하고, 아직 서류 합격 연락은 못 받았지만 지원했던 전일제 직장의 면접도 미리 준비해야 하고, 어제 짠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퉁퉁 부은 얼굴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씻고 치장해야 하고, 조금..
목요일에 면접이 잡혔다. 지난번 탈락의 쓰라림이 아직 남아있는 지금 꽁무니 빠지게 면접을 준비해야겠지만, 또 구인란을 뒤졌고, 이번 면접에 합격하고도 병행할 수 있는 파트타임 일을 찾아냈고, 지원서를 쓰다가 이리로 왔다. 얼마 전에 교육을 들었다. 교육을 통하여 감개무량하게도 범죄피해평가를 할 수 있는 전문가 자격이 주어졌다. PAI와 관련 깊은 회사에 다녔던 것과 청소년상담사 2급(레알 효자 자격증) 덕택에 그 자격을 부여받은 것 같다. 내가 갈 지역은 강원도이고, 범죄피해평가 전문가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어 일을 하려면 (아직은 없는) 기존 직장에 휴가를 내거나 업무가 없더라도 종일 일정을 비워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으면서 이미 범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신을 상상하며 의기양양했..
현과 차로 오며 가며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준비하던 것들이 잘 안 된 데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상담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대학원에서 만난 친구 중에 센터 차려서 하다가 접고 이제 다른 직종으로 옮긴 애가 있다, 거기에 만족하면서 일하는 것 같아 좋아 보였다, 상담 일은 품이 너무 많이 들고 어렵다고 뼈아프게 느낀 것 같더라, 그런데 현이 "상담 센터 차리는 거 좋네!"라고 해서 얘가 앞에 몇 마디만 듣고 딴생각했나 싶었다. 상담 센터 차려서 하다가 잘 안 되어서 접은 거라고 다시 설명하니까 현이 자기가 여태 모은 돈으로 뭘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뭘 하나 차려서 사람을 고용하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단다. "아, 그럼 센터 차려서 나를 고용하겠다고?" 어렸을 때..
혼자 카페에 가는 일은 잘 없다. 애초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에게 카페는 만남의 장소일 뿐 커피 맛을 음미하는 공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갈 할라 쳐도 카페에는 2단 독서대가 없다(집에는 있다). 대신 듣고 싶지 않은 음악과 소음이 있다. 또한 고작 혼자 카페에나 가자고 씻는 것은 뭔가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집 근처에 이라는 독서실급의 공부하기 좋은 카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심지어 그곳에서 각자의 할 것을 들고 온 두 지인이 알고 보니 옆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야 처음 방문해 보았다. 2층에 자리한 나도 물론 혼자이지만, 2인 이상 함께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노트북 및 태블릿 PC를 지참하고 할 일에 열중하는..
수험번호가 떴다. 지난번에는 원서를 좀 늦게 냈었는데 번호가 앞이라, 이번에는 원서를 빨리 냈으나 역시 앞 번호다. 지난번 수험번호보단 늦지만 빼박 모든 시험은 첫날에 친다는 확신이 드는 빠른 번호... 4일 만에 운동하고 씻었다. 샴푸를 칠하고 씻어내고 한 번 더 칠하고 씻었다. 머리칼과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으니 정말 상쾌했다. 거실에는 공기청정기와 제습기와 에어컨이 돌아간다. 정확한 날짜는 안 떴지만 시험이 일주일도 안 남았다고 봐야 한다. 다시금 공부한 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시험 때 아는 문제가 그래도 두어 개 나온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번 시험만 끝나면 꼭 일을 구해야지. 책도 더 많이 읽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피아노도 오랫동안 쳐야지.
세상에 좋은 글을 정성스럽게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글을 쓸 바에야 한 번 더 자고 숙취 해소를 꾀하는 게 낫겠지만, 머리가 복잡해서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술을 퍼 마셨다. 시험을 앞둔 자로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는 생활이란 만족스럽기 그지없지만, 일과 사랑 모두를 놓칠 위기에 처한 삶은 잠들 무렵 죽음 떠올리게 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운 불안이었다. 약속이 잡히자 알코올이 가져다주는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기다리게 되었다. 술 취해서 한 실수가 100개는 넘을 텐데 그것보다 즐거운 기분이 더 기억에 남는다니 뒤늦게 신기하네. 아무도 마시라고 내게 강요하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도 있어서 그 친구의 페이스에 맞춰도 됐을 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