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없다. 데이트하는 날인가 보다. 연락 오면 산 정상의 풍경을 보여 주려 했다. 산의 시원한 조망을 좋아했던 것 같아서. 그리고 내가 멀쩡하고 건강하고 부지런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대신 양껏 짧은 옷을 입고 따뜻한 봄 날씨를 만끽하러 나갔다. 무릎보다 긴 타이즈를 처음 신어 보았다. 요즘엔 체형을 신경 쓰지 않고 옷을 입는다. 어떻게 보이든 내가 나라는 증명이 필요하다. 언젠가 길 가던 이의 오버니삭스가 마음에 들어 옆의 애인에게 말했더니 오타쿠 복장 같다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오늘 나는 오타쿠였다. 다행히 Y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Y는 내 외양에 관심이 없고 그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타르>를 보고 어떤 토론 주제가 떠올랐다. 다소 긴박하고 날카롭게 Y에게 그 얘길 했다. Y는 놀라울 정도로 유했다. 그가 내게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일까지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하는 본인의 사고 과정을 쏟아낼 때 내가 Y가 되는 것이구나, 느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자의 기쁨은 컸고, 3시간이 채 되지 않는 수면 시간의 부작용은 전혀 안 느껴졌다. 산을 오르면서는 그가 내게 오길 기원했으나, 내려가면서는 그가 떠나 주길 바랐다. 머릿속, 일상생활, 인생에게 꺼졌으면 했다. 어린 시절의 불행을 토로하며, 자신이 왜 애인에게 집중하지 못하는지 묻는 그의 옆에 언제까지나 있고 싶었고, 당장 차갑게 돌아서고 싶었다. 답변도 두 가지가 있었겠지. 무슨 일이 있든 애인과 오래도록 관계 맺고 싶다면 이미 그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 다른 한편으론 당신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만큼 당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으라는 것.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전자이기에. 나는 후자라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나 한눈파는 데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해밖에 없다. 실은 그가 행복했으면, 승승장구했으면, 편안했으면 하고 제일 많이 기원했다. 각자의 궤도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보고 고마워하고 응원하는 사이 좋잖아. Y와 오늘 즐거웠던 것처럼. 그렇지만 난 Y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하거나 고마움을 전할 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