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분일초 빨리 자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내가 써야 할 글은 일기가 아니라 보고서라는 것도 알지만 오늘 정말 즐거운 일이 있어 소회를 남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찬과는 무려 연애 3주년을 맞아 기념했다. 그도 나도 누군가와의 3주년은 처음이었다. 찬은 이전 나의 최장기 연애 기간이 2년 11개월인 걸 듣고 자신이 이겼다고 표현했지만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찬과는 기대를 다 내려놓은 바로 지금이 가장 순탄하다. 그는 더 이상 날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저녁을 먹으러 지하철을 타고 나가다가 오랜만에 크게 다퉜는데, 내가 제기한 문제점을 이해한 그는 다음 날 바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눈이 띄는 변화는 처음이었다.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그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도 노력하고 나도 노력한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고 모든 걸 통제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전일제 직장에 취직한 것이다. 다양한 선택지 중 실은 일을 좀 더 쉬는 것도 가능했지만, 생활패턴이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운동과 독서로 마음을 다 잡아도 녹아내리는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 아니면 도 인생, 백수에서 7시에 출근하는 생활로 탈바꿈했다. 9시까지 출근이지만 7시에 집에서 나선다. 직장이 아주 멀기 때문이다. 이 직장은 마치 단짠이다. 공고를 보고는 가장 관심 있었던 일이라 벅찬 마음으로 지원했다. 물론 먼 거리는 부담이었지만, 주변 장거리 출퇴근자들로부터의 간접 경험으로 인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두어 달만 버티다가 직장 가까운 쪽으로 이사 가면 되니까! 면접 준비도 열심히 하여 실제로 면접관에게 "준비 많이 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갔더니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합격 발표를 들었을 때 갈지 말지 망설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소망하던 곳이라 아예 안 가기엔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일단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튀려고 했다.
첫 출근 날 꿈을 꿨다. 평소에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남자 배우가 나의 연인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진짜 너무 잘생긴 것이었다. 뭘 할 생각도 안 하고 보면서 좋아했다. 새벽에 깼지만 꿈 덕분에 왠지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꿈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길몽이라 점쳤다). 오랜 시간을 들여 출근을 하니 센터는 면접 때의 기억보다 훨씬 깔끔하고 치료실 또한 아늑했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곳이라 다들 신입이었고, 조직 문화와 체계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더 익숙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도 지금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실장이자 중간관리자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제언을 해야 한다. 당연히 처음이라 부족할 테지만 시작 안 하면 영원히 못할 것이다.
이런 초짜에게 도움을 줄 분이 오늘 교육을 해 주러 사무실에 방문하셨다. 그 교육자를 예전에 봤던 동료들이 '착하신 분'이라고 하여 뵙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고, 회사 안에는 나에게 일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 실제로 기댈 데가 그분밖에 없기도 했다. 진짜 오랜만에 사람을 보고 반했다! 그게 조근조근한 서울말 속에서 처음 경상도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였는지, 수려한 언변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는지 모르겠다. 범상치 않으면서 범상했다. 내가 제일 호감 갖는 양면적인 사람이었다.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퀴즈까지 내셨는데, 본인이 수퍼비전한 (우리의 공통점인)보고서를 1초 보여 주었다. 평소 얼굴과 웃을 때의 얼굴이 아주 달랐다. 우리 업계 사람들이 흔히들 그렇듯 그분도 신념을 갖고 고수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하는 만큼, 딱 그만큼이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월 의식이나 냉소주의적인 태도가 없었다. 그분은 진정한 의미의 전문가였고, 다양한 현장에서 꾸준히 내담자 및 환자군들과 소통해 왔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셨다. 내가 다양한 군상의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 여기저기 발 걸쳐 놓고 있는 것처럼, 그분은 이미 여러 경험을 하셨는데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계속 나아가려고 하시는 게 너무나 보기 좋고, 나에게까지 희망이 느껴졌다. 나와 무려 학회 두 곳이 겹치고(나는 수련생이고 그분은 전문가이지만), 내 예상처럼 동향이었으며, 함께 아는 다른 이들이 무려 둘이나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나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분도 호감을 표해서 기뻤다. 기쁨에 그 지인과 몇 년 만에 약속까지 잡은 것은 덤이다. 그분에게 무엇을 위해서 계속 전진하시는 건지 물어보진 못했지만, 그런 사람이랑 같은 공간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게 긴장되면서도, 그분이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맙고 다행이었다. 나도 내가 하는 게 틀리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외부에서의 피드백을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내가 그분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뒤따라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이번 생에 그만큼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첫 발은 뗐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재미있어졌으면 좋겠다. 벌써 조금 재미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