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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0331 vendredi

도르_도르 2023. 4. 3. 14:52

'i(소문자 아이) 모임'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있다. 내향인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모인 것으로 여건 상 홍대, 합정 일대에서 만나지만 i답게 조용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모임의 성공 여부가 조용한 장소를 찾냐, 못 찾냐라서 그런 곳을 찾게 되면 헤어지는 순간까지 조용한 곳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을 남기느라 바쁘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도 홍대, 합정에서 기어코 조용한 데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모임에서는 이야기를 혼자 길게 끌고 가는 사람이 없다. 질문을 하면 다들 먼저 대답하라고 상대에게 손짓한다. 대답을 한 사람은 몇 마디만 하고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내향인도 종류가 다양하다.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 있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 매사에 조심스러운 사람이 있다. 관심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 길게 하면 당연히 지루하게 느껴진다. 이 모임에는 지루하게 만드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감질맛이 난다. 말을 적당히 하고 마니까 궁금해서 더 묻고 싶은데 그러면 혹시 상대가 불편할까 봐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추가 질문이 아무도 거슬리게 하지 않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술을 좀 마시면 심호흡하는 걸 잊어서 막무가내로 묻게 된다. i의 대답은 정성스럽고 가장하는 구석이 없어서 집중이 잘 된다. 약간 쑥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그리고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질문하려고 하는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 흰색도 아니고 빨강도 아니고 딱 복숭아 같은 주황빛의 텐션. 길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적당한 발화양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채우기 때문에 집에 갈 때쯤엔 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 다시 만나면 리셋되긴 해도 또 일련의 그 과정들(조용한 장소 탐색, 심호흡하기, 질문하기, 대답하기, 조용한 곳 찾아서 좋았다!)을 해 나가는 게 재미있다. 헤어지기 전에도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꽃구경과 사진 찍기와 더불어 i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요즘 하고 있는 자격증 수련 관련해서 슈퍼바이저의 피드백이 왔다. 메일 내용을 힐끔 보니 수련 수첩을 또 수정해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진짜 끝난 줄 알았는게 아직 끝이 아니었다니. 수련 수첩 작성을 너무 하기 싫어서 이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하기 싫다고 앓는 소리를 해 왔다. 집에 돌아와서 부글대는 마음으로 본격적인 메일 확인을 해 보니 생각보다 수정할 부분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슈퍼바이저가 작성한 내용이 많아서 고생했겠다 싶었고, 짜증스러웠던 게 미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써 주신 슈퍼바이저의 피드백을 보고는 울컥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여덟 개는 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나. 하기 싫음을 극복하고 모든 과정을 마쳤으니, 원하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수련 과정에 자주 빠지는 것도 불만이었는데 수퍼바이저가 이렇게 마음을 알아 준 거 같아서 더 울컥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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