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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0327 lundi

도르_도르 2023. 3. 28. 08:04

고생 끝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단 3페이지 빼고 모두 작성해서 냈다. 이제 그 3페이지만 완성하면 이 고행이 끝나는데, 해방감을 다소 미리 맛본 나는 계속 미뤘다. 책을 읽고, 정성스럽게 태블릿에 필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평소엔 하지 않는 일까지 했다. 바로 웹툰 보기. 보게 된 계기는 잊었고 처음엔 최근에 나온 외전을 몇 편 보았다. 주인공이 결혼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결말을 보니 과정이 궁금해져서 아주 밤새 정주행을 하게 되었다. 한참 봤지만 아직 주인공이 누구랑 결혼한 건지 확신이 안 선 가운데 중도에 휴대폰을 닫은 것은 나도 모르게 응원하던 남주를 여주가 차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녀석 때문에 한참 울기까지 했다. 머리로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포르노와 다름 없으며 뻔뻔하고 작위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자존감 낮고 자기상이 부정적이며 타인과 자신을 쉽게 비교하여 불행을 사는 여자 주인공이 있다. 구김살 없고 선하기는 하다. 그의 곁에는 두 남자가 있다. 첫째, 영화배우의 아들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심지어 정석 미남형으로 엄청나게 잘생긴 데다가 공부와 요리까지 잘하는, 다소 사회성이 부족하나 그것마저 매력인 남자. 둘째, 어려운 환경에서 방황하고 고생했지만 재능이 출중하고 티키타카가 아주 잘 되는, 힙한 요즘 스타일의 (역시나) 대단한 미남형의 남자. 여주인공은 첫째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표현하지 못하다가 첫째가 한국을 떠나는 날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둘째 역시 여주인공을 일찌감치 좋아하고 있던 터였기에 첫째의 부재 속에서 여주인공은 둘째와 연인이 된다. 4개월밖에 안 만났다지만 둘의 설렘과 애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꿈을 포기했던 둘째가 다시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게 되었고, 안타깝게도 둘째의 꿈은 연예인이었다. 둘째가 데뷔에 다가갈수록 연애는 삐걱거리게 된다. 여주는 유명인과의 불편한 연애를 원하지 않았고, 나중에 둘째가 진짜 연예인이 되면 연애가 더욱 힘들어질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래서 여주는 둘째에게 헤어짐을 고한다. 이 장면에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상상을 했다. '내 애인이 연예인이면?' 여주가 그와 헤어진 후 그가 정말로 꿈을 이뤄 방송에 나오는 걸 볼 때마다 내 헤어진 연인이 연예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찬도 직업적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다 보니 SNS를 자주 사용한다. 연애 초기에 그의 벗은 몸 사진에 달린 복근에 빨래해도 되냐는 여성의 댓글을 봤다. 솔직히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여자친구라면 기분 나빠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웹툰의 여주인공처럼 이성으로부터 DM이나 댓글 등의 관심을 받는 게 연애 전선의 이상과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인 관계에서 누군가 하는 역할을 알량한 텍스트 한 줄이 대체할 수 없으니까. 이렇듯 현실은 웹툰과 아주 달랐다. 최근에 작은 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남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작은 키에 신경 쓰는 남자의 삶을 모르고 살았다. '남자, 여자, 크다, 작다'로 4분면을 만들었을 때 아마 가장 어려움이 큰 집단일 것이다. 안타깝고 속상했다. 하지만 웹툰의 남주들은 반올림하면 190cm가 되는 신장과 수려한 얼굴과 엄청난 비율을 자랑했다. 나는 여태껏 겪은 모든 이별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연인과 헤어지기 어려워하고, 심지어는 다른 관계들에서도 쉽게 못 돌아선다. 늘 늦게 떠나고, 더 오랫동안 남아서 기다린다. 그런데 웹툰의 주인공은 그렇게 서로 좋아했으면서 대번에 헤어졌고, 칼로 무 자른 듯이 반듯하게 게다가 신속하게 마음 정리를 했다. 연인 사이였을 때의 회상 장면이 나오면 그 남자와 연애하지 않은 나는 아직 눈물을 쏟고 있는데 자기네는 벌써 정리를 했다니 말이 돼? 웹툰의 세계에서는 외모와 마음이 쉽게 그려졌다. 그렇지만 그 세계도 달콤하고 절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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