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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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0603 samedi

도르_도르 2023. 6. 4. 03:01

C가 멋지다고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오늘은 가까스로 잡은 C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그동안 평소처럼 일했다. 일하다가 의문점이 있으면 C를 찾았고 C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C는 직무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다정했다. 나는 그와 소통했지만 그는 나 같은 몇 십 명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직무였다. 그를 조망하기 어려웠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걸 제시할 수 있기에 그에게 보여 줄 게 없었다. 우리가 함께 어떤 행사에 참여할 확률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그와 만날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C가 드디어 일정을 조정하여 나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원한 건 낮과 커피가 아니라 밤과 술이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을 확정한 그날부터 퇴근 후까지도 연락을 하게 되었다. 아까 그는 자신을 일과 일상을 구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에 비춰 봐도 이상하고 그 사실을 몰랐을 때에도 왜 자꾸 끝인사를 받지 않고 답장을 하는지 의문이었다. C가 나에게 관심이 있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아니길 바랐다. 오랫동안 찬과 헤어지는 일을 미뤄왔다. 나는 확실히 알고 찬도 아는 것 같은 예정된 이별을 우리는 이행하지 않고 있다. C는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존재였다. C와 주고받는 메시지들은 그리 재미있는 내용들이 아니었고 나는 번번이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쩌라는 거야!"를 외쳤다. 그렇지만 너무 궁금했다. C가 뭘 좋아하는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저녁 식사 메뉴는 뭔지, 연휴 땐 뭘 할 계획인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왜 이 분야를 선택했는지, 어떻게 꾸준히 공부할 수 있었는지 등등.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하고 나이나 결혼 여부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가 멋지고 귀엽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스로 뭐라고 답장하고, 뭐라고 묻고, 또 뭐라고 답장하고, 이게 혹시 썸인가 생각이 들어 주변에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머리가 금방 길었다.

오늘 C가 차를 마시자고 하면 시원한 맥주를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어제야 연락이 와서 오늘 나와 '낮'에 '카페'에서 만나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나는 카페를 찾겠다고 하고 하나도 검색하지 않았다. 대신 즉흥적인 술자리를 만들어 맥주를 마셔댔다. 어제 점심은 닭가슴살과 방울토마토였기에 맥주 2000cc에 안주 세 개인 저녁 식사는 제대로 급발진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한 시간 넘게 공원을 걷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는 치킨을 시켜서 라면과 거하게 먹은 다음에 또다시 공원에 조깅을 하러 나갔다. 약속을 지키려면 시간도 없었고 날도 더운데 그냥 막 달렸다. 뱃속에서 음식물들이 아우성치는 게 느껴졌다. 돈 쓰고 시간 쓰며 불안을 달랬다. 씻고 머리를 말리다가 흰머리를 네 개나 뽑았다. 짧고 얇은 모질로 보아 C를 알고 나서 새로 생긴 녀석들인 것 같았다. 나는 C보다 먼저 카페에 도착해서 땀을 닦을 시간이 있었다. 인사를 하는 C의 목에서는 땀 한 줄기가 흘렀다. 향수 냄새가 짙었다. 그는 빨대가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가져와서 앉자마자 회사 이야기를 했다. 아주 길었다. 뭘 감추려는 의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새삼 그의 일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회사, 학위, 커리어, 자격증 뭐 이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서로 박사 언제 갈 거냐, 난 안 갈 건데 당신은 빨리 가라고 밀어넣는..). 그는 나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하기 바쁘면서도 사적인 정보는 별로 알려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나이를 말하길래 "당신은 몇 살이냐!"하고 끼어들어서 겨우 그의 나이를 파악했다. 일하지 않는 C를 그릴 수가 없었다. C와의 관계는 나에게 너무 낯선 것이었다. 계속 일이나 공부를 끌고 오면 그와 나는 절대 동등해질 수 없는데. 찬에게 일부러 논문 이야기를 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내 딴에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의 피력이었으나 찬은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은 누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알 수 없다.

행사장에서 그는 만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했다. 나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선약이 있던 그는 갔고, 그제야 화장실에서 내 모습을 확인했는데,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보기 좋았다. 뒤늦었지만. C는 새벽 2시가 넘어서 내가 이제 자겠다고 할 때까지 메시지를  멈추지 않고 보냈다. 회사 이야기를 또 하길래 나도 오기가 생겨 일 이야기를 덧붙였다. 물론 내가 일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지 관리하는 게 그의 직무이긴 하지만, 일요일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그거 확인하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월요일에 타 지역에서 있을 교육을 마치고 귀가할 때 그가 나를 태워 주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내가 과연 업무라는 주제를 비집고 어느 빈틈에 "짱짱 멋있으세요!"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의 향수 냄새 말고 명확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애매한 상황이 좋을 수도 있다. 어디에 떠밀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상황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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