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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분이 안 풀린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소중한 관계에서만큼은 회피 안 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이제 그냥 놓고 싶다. 잘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그 기록이 손에 있고 자꾸 보기 때문일까? 없는 셈 치고 안 보면 나아지려나? 궂은일 했다고 애지중지 카타코토의 카레를 들고 퇴근길 사람들을 비집었던 그때 그는 사케니 하이볼이니 주종 고르기에 바빴다는 게,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말 안 하면 자기도 입 다무는 게, 넘어가기 힘들다. 처음엔 왜 그랬는지가 궁금했고, 다음엔 왜 감췄는지가 궁금했는데, 그 다음엔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헝클어졌다. 나랑 다른 거 알지. 내가 하는 걸 그는 안 하고, 내가 못하는 걸 하는 사람이라는 거 알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는 건데? 시원치 않은 그런 대..
얼마 전에 만난 EJ는 최근 애인과 헤어진 소회를 밝혔다. "아쉽긴 하지만, 원래 없었던 것이고, 꼭 있을 필요도 없는 건데." 찬과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나에게도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어제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오늘 예정된 저녁 약속의 주인공은 친한 남자 동생들이 아니었다. 미분당 쌀국수를 먹었던 날 메시지를 보냈던, 내 생일날 찬이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려줬던, 그의 사진과 영상들을 그에게 잔뜩 보내던 바로 그 여자와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물증을 들먹이니까 그제야 사실을 실토했다. 실망스러웠다. 그가 너무 솔직해서 나를 불편하게 할지언정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초지일관이었다. 내가 싫어하니까, 내가 걱정할까 봐 그랬단다. 나..
MJ가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사자는 아니라고 했다. 전말은 이랬다. MJ는 여러 차례의 소개팅 끝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둘은 웨딩플래너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둘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관계가 회복됐지만 더 이상 결혼 이야기는 나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남자 친구를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딸이 남자 친구를 인사시키고 웨딩플래너와 만났다는 사실을 안 그녀의 부모님은 언제 결혼하냐고 그녀를 채근했다. 내가 "너 결혼해?!?!?!!"라고 했을 때 MJ는 남자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을 무렵이었단다. 그녀의 입장이 참 곤란하겠다 싶었다. 애인이 거리끼는 행동을 했을..
그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를 지켜줘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한 번도 상처 받은 적 없는 듯이 늘 새롭게 내 기분을 맞춰주는 그가 안쓰럽다.
코로나 시대. 새로운 일과 새로운 남자, 이 두 가지가 나의 가장 큰 변화이다. 대학원생 때는 시간당 20만 원을 받는 상담사가 되기를 기원하였으나, 상담사로 사회에 발을 내딛으려면 연봉도, 복지도, 심지어 고용도 보장되지 않는 얼마인지 모를 얼마간을 감수해야 했다. 졸업이 다가와도 이게 정당한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결단이 서지 않았다. 때맞춰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다. 상담센터들이 문을 닫았다. 특히 관심 있었던 청소년상담복지센터들은 입사 서류를 받고 연락이 없다가 몇 달 뒤 채용이 연기되었던 거라고 뒷북을 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서류 광탈이 익숙해지자 상담 말고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 행정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과하게 투자한 학비를 보상받진 못하더라도 관련된 일을..
근황. 요즘 이웃 분들의 포스팅이 별로 없어서 나도 뜸해졌다. 그는 이전보다 이른 퇴근을 하고, 나는 운동을 안 한지 한 달이 넘었다. 친구가 된 직장 동료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오랜만에 집을 돌보았다. 택배들을 대충 정리했다. 조르바와 밀 파티를 즐기며 깊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책 한 권을 완독했다. 집에 있는 다이어리를 폈다. 임상심리사 교재도 펼쳤다. 셋 다 얼마만에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안 해도 될 줄 알았던 설거지를 마친 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고독과 몰입의 상반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는 고독과 외로움이 뭐가 다르냐고 했다. 일단 같다고 생각하라 말했지만, 난 저자가 아니니 알 도리가 없지.
HT와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는 예쁘장한 외모에 장난이 심했다. 그를 좋아하긴 힘들었지만, 누가 물으면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4학년이 되기 전에 집 근처에 생긴 학교로 전학 갔다. 그래도 서로 아는 친구들에게 종종 소식을 들었다. 수능 이후에 그는, 공부하겠답시고 저장된 연락처를 거진 다 지우고 휴대폰 번호를 바꾼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했다. 버스 타고 하교하는 모습을 봤다나. 소도시 학생들의 조밀한 연락망을 피해 갈 수 없었던 나는 그와 꽤 친해졌다. 해안 도로에서 자전거를 탔고, 를 보러 디브이디 방에 갔지만 실망했고, 그가 JJ에게 장난 전화를 걸도록 부추겼다. 그는 평생 갈고닦은 내 취향의 책과 영화들을 봐주었고, 듣도 보도 못한 관점으로 혹평을 날..

그의 퇴근이 두 시간 빨라졌다. 서로 먼저 씻으라고 아우성치고, 늦장 부리면서 게임하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책을 읽었다. 선물 받은 이슬아 작가의 을 읽다가(너무 고마워!) 많이 울었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눈물부터 났다.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들의 세계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북돋아 주는 어른 때문일까. 누가 어떻게 보든지 상관 않는 날들이다가 문득 그가 나의 특정 모습을 밉게 여길까 우려되었다. 궁금한 건 바로 물어볼 수 있는 게 우리 관계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이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뜸을 들였다가, 머리 말리는 모습조차 늘 새롭게 느껴진다며 지겹지 않아서 내가 좋다고 했다. 그가 말을 잠시 멈췄을 때 '이 표현이 과연 적당한가?' 한 번 고민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