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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1125 mercredi 본문
HT와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는 예쁘장한 외모에 장난이 심했다. 그를 좋아하긴 힘들었지만, 누가 물으면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4학년이 되기 전에 집 근처에 생긴 학교로 전학 갔다. 그래도 서로 아는 친구들에게 종종 소식을 들었다. 수능 이후에 그는, 공부하겠답시고 저장된 연락처를 거진 다 지우고 휴대폰 번호를 바꾼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했다. 버스 타고 하교하는 모습을 봤다나. 소도시 학생들의 조밀한 연락망을 피해 갈 수 없었던 나는 그와 꽤 친해졌다. 해안 도로에서 자전거를 탔고, <러브 액츄얼리>를 보러 디브이디 방에 갔지만 실망했고, 그가 JJ에게 장난 전화를 걸도록 부추겼다. 그는 평생 갈고닦은 내 취향의 책과 영화들을 봐주었고, 듣도 보도 못한 관점으로 혹평을 날렸다. 성인 대우를 받는 1월이 되자 서로의 친구 한 명씩을 불러 고깃집에 갔는데, 같은 가게에서 마침 회동을 한 HT와 나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나기도 했다. 얌전한 고양이가 법적으로 가능해지자마자 남학우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걸 보고 우리 선생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계산을 해주셨다. 그것은 인생 최초의 남녀 짝 맞추어 놀았던 일화이며, 어찌나 즐거웠던지 지금도 짝 맞춤을 이상적인 모임의 조건이라 여긴다. 당시 HT는 대학 진학에 고민이 컸다. 선택지 중에는 나랑 같은 학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지역의 대학을 택하였고, 그 뒤로 10년 정도 서로 멀리 살았다.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스무 살 때다. 지금은 그때가 우리 모두 발달 중이라 시행착오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에너지를 적절하게 발산하지 못해 나를 당황케 하는 이들에게 질려 있었다. HT는 달랐다. 그는 부모님께서 애써 마련해 주신 신축 1.5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했다. "나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거야." 했을 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가 보수적인 사람인 데에 안전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너보다 훨씬 다채롭고 재미있는 인생을 살 거라는 호기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말로는 안 하면서 보여주려던 그 지점도 알았을 것이다. 알아차렸는데도 묵묵하게 바라보는 게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알게된 때가 언제였을까. 그는 풋풋하고 고마운 사람으로, 마음 한 켠에 자리했다.
그런데 얼마 전 생일 축하를 받고 안부 인사를 나누며, 걸어서 그의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화장실에서 삐죽 솟은 흰머리 한 가닥을 발견했다. 누가 볼 새라 뽑아냈지만, 더 이상 열아홉도 스물도 아니라는 신호였다. 그가 나를 보고 나이 들었다, 예전 같지 않다, 고 생각하면 속상하겠지만, 그건 사실이고, 그도 나이를 먹은 건 마찬가지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회가 되어 이렇게 친구를 만날 수 있음 감사해야지, 내가 기억하는 좋은 모습들을 그는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을 거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만큼 변하진 않았겠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들로 조금 긴장되었다. 그는 걸쭉한 사투리로 전 남자 친구 이후로 아무도 부르지 않는 내 별명을 외치며 식당에 입장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한 잔상이나 내 상념 위주로 남아 있었는데, 직접 보니 그가 예전과 똑같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내가 준비한 건 우리가 함께 아는 사람들 간에 발생하고 소멸된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우리 부모님이나 내 동생의 안부까지 물었다. 우리 아빠도 여쭤보지 않으시는 "회사에서 돈은 많이 주고?"라고 했다. HT가 아파트에서 산다는 사실을 안 찬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큼의 자금을 들였는지 알아오라는 지령을 내렸지만,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에서 박사 과정 중이면서도, 자기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자신의 소속처를 말하면서도, 새 것 같은 그랜저를 타고 다니면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지."와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 알고 보니 내년에 결혼을 하는데 부모님과 여자 친구의 경제력으로 그 과정을 추진 중이며, 재테크 이야기에 동참할 수 없어 친구들과의 만남이 살짝 꺼림칙해진 모양이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아파트가 뭐람. 그의 여자 친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그런 것들을 물으면 그가 부담스러울까 최대한 조심했다. 그가 연구든, 학교든 개인적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끈덕지게 늘어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공부를 생활화하는 학자였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을 앞에 붙이고, "좋... 반갑다!"라고 정정하는 등 한마디에도 신중했다. 오래 공부한 사람 특유의 진지한 눈빛과 정돈된 태도에 겸허하고 솔직한 성격까지, 배려다운 배려를 아는 그는 배울 점이 더 많아진 친구였다.
찬을 만나서는 잔뜩 심통이 났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자꾸 그 생각을 하고 입 밖으로 내니까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 것 같은 느낌도 싫고, 입 닫고 혼자 끙끙 앓는 것도 싫었다. 이건 나와 그 사이의 내적 문제여서 다른 요인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와 있으면 또 다른 장이 열리기 때문에 그 또한 그럴 것이라 지레짐작했나 보다. 짜증을 내면서 동시에 그가 날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까 봐 겁나고, 기분이 잔뜩 헝클어졌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내 기분이 좋아질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걸 해주진 않으면서. "이렇게 심술부려도 넌 짜증 안 나?" "나도 원래는 화내고 삐지고 잠수도 타 봤지만, 너한테 그러면 나도 힘들고 너는 더 힘들 테니까 꼬리를 내린 거야." 지금이라면 그의 적절한 관용어 활용을 칭찬했겠지만 당시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꼬리를 자른 것처럼 내게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면 도대체 왜 나를 원하지 않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외모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면도 사랑한단다. 아니, 그럼 외모만 좋아하면 많이 원하고, 내면까지 좋아하면 덜 원하게 되나? 내가 따지고 드니까 찬은 내가 '내 외모만 좋아해!'와 같은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기에 나를 소중히 대하고 싶다고 했다. 참 내. 나는 너처럼 몸짱이 아니라서 네가 아무리 날 원해도 '스킨십을 좋아하는구나.' 하지, 그런 생각 안 한다고! 다시 열불이 나려는 그때 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잖아." 나는 우리가 하는 게 대화라기보다 나의 일방적인 기분 저하를 그가 달래주는 느낌이라 그게 지금 상황을 설명한다는 걸 처음엔 몰랐다. 그는 요즘 신경 쓰는 게 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듣고서야 어제 이직이 결정된 그가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확 이해되었다. 둔감했던 게 미안해서 아득했다.
그는 지금 결정된 회사에서 통보를 받을 때까지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통제 밖의 일이니 손을 놓으면 될 것을 너무 중요하니까 그러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결국 원하던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걱정은 이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나한테는 빙그레 웃으며 불편한 기색을 안 보였지만, 우리 엄마가 한 소리한 것도 영향이 있겠지. 나는 출퇴근 시간이 길어져서 힘들겠다, 정도였지 그 이면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리한다는 건 몰랐다. 그가 잘할 거라 여기기도 했고. "그래도 내가 상담 전공인데, 진작에 말하지. 나한테는 매번 참지 말라고 그러면서." 그는 지인의 상담은 안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말 못했다고 했다. 바보. 그건 상담실에서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게 안 되는 거지, 사람들이 서로의 치료자가 되어 주는 건 당연한 건데! 재양육은 나만 받고 있었나 보다.
W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한국인 동료들은 앞으로 어쩌냐, 한국 가서 재취업은 어떤 업종으로 할 거냐, 등등을 물었는데, 외국인 동료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은 놔두고 방에 가서 짐부터 싸라."고 했다는 이야기. 찬도 지금 짐부터 싸야 했다. 내가 입 닳도록 말한 운전면허를 먼저 따도록 해. 주택 청약 들고. 미리 걱정해서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걱정하지 않고도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 그렇게 하나씩 행동하면 불안도 줄어들 거야. 걱정되는 걸 구체적으로 쓰거나 말하는 것도 도움이 돼. 그럼 문제도 명확해지고, 찾은 답도 맞을 확률이 높아져. 그러니까 일기를 쓰라는 거야.
그는 고맙다고 했지만, 자괴감이 들었다. 자격지심이 가득해서 말이 많아졌는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HT를 짧게 보면서 그가 살아낸 인생을 예상하고 지지하는 건 쉬웠으나, 매일 보는 찬이 가진 어려움은 충분한 단서가 있었음에도 매번 지나쳤다. "나는 누가 나한테 먼저 화내지 않으면 화 안 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그가 내게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는 나의 작은 변화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궁금해하고 피드백을 주는데, 그 혜택을 똑똑히 받고서도 나는 내 요구의 좌절을 응징이나 했지 그의 편에 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내 옆에 있는 그에게 더 가까이 와달라고 졸랐다. 나도 눈을 꿈뻑이며 더 잘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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