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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124 mardi

도르_도르 2020. 11. 25. 15:36

그의 퇴근이 두 시간 빨라졌다. 서로 먼저 씻으라고 아우성치고, 늦장 부리면서 게임하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책을 읽었다. 선물 받은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다가(너무 고마워!) 많이 울었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눈물부터 났다.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들의 세계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북돋아 주는 어른 때문일까.

 

누가 어떻게 보든지 상관 않는 날들이다가 문득 그가 나의 특정 모습을 밉게 여길까 우려되었다. 궁금한 건 바로 물어볼 수 있는 게 우리 관계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이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뜸을 들였다가, 머리 말리는 모습조차 늘 새롭게 느껴진다며 지겹지 않아서 내가 좋다고 했다. 그가 말을 잠시 멈췄을 때 '이 표현이 과연 적당한가?' 한 번 고민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알아차림이 우리 사이에 점차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그는 세상 다 산 노인 같으면서도 천진한 아이 같다. 투명하게 다 보이다가도 심연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린다. 물처럼 유하면서 금처럼 견고하다. 공작새인 양 화려하게 뽐내지만 수줍음을 못 감춘다. 한정된 어휘로 정확한 표현을 구사하는 그 앞에 서면 무장 해제된다. 나를 이루고 쌓아왔던 것들이 무력해진다. 변화무쌍한 그는 적재적소에 알맞은 자기를 보인다. 위기 상황에서 뜻밖의 방법으로 마음을 풀어주기도 한다. 내 말에 그건 절대 아니다, 라고 부정하지 않지만, 자기 마음은 누가 뭐래도 지켜내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오히려 내가 그렇다고 했다, 언제나 새롭고 귀엽고 편하다고. 그러니까 우린 잘 맞는 거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가 편안한 상태로 내밀하고 고유한 서로를 뜯어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세상에는 옳고 중요한 게 있고, 절대 답일 수 없고 무시하고 싶은 것도 있다. 나는 책에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현자들이 남긴 유산은 줄기가 비슷했고, 각기 다른 이야기는 종내에 합쳐졌다. 반면, 그는 인생에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 수명이 150살이 되면 삶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절로 체득할 터이니 인문학이 필요 없을 거라는 어느 미래학자의 말처럼, 그도 촘촘한 경험들에 기반하여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다른 환경에서 30년 가까이 자란 우리는 만나 보니 머릿속 밑바닥이 비슷했다. 다만 그는 자신보다 내가 좀 더 치우쳐 있다고 했다.

 

그는 A한테 갔을 때 그가 별로라면 다시 혼자 돌아와 B에게서 '이 정도면 괜찮네.'를 느끼다가 C가 정말 좋다면 C 옆에 붙어 있을 거란다. 나는 바빠서 A가 마음에 안 들어도 쉽게 그를 못 떠날 것 같다. 헤어지면 진탕 욕을 하겠지. 아직 만나지 않은 B와 C의 가능성에 대해 머리 아플 정도로 생각하면서 안 그러는 척할 거고. 어디에 속하지 않아도 조바심 없이 A, B, C 모두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여유가 좋았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빨리 찾아 분명해지고 싶었지만, 그는 주변의 것들에 자신을 비추어 좋을 때 그걸 택했다. 스스로는 관대함을 주무기라 내세우는 나를 그는 모난 데 있고 예민하며 공식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느낌을 나도 알 것 같아서 따뜻하게 말해주었다. "살수록 자신에게 진리인 것들이 생긴다. 넘기려고 해도 눈에 밟히는 것, 해결 못했을 때 더 마음에 남는 것, 이게 조금 더 옳고 저게 조금 더 나쁘다는 것을 살면서 계속 알게 된다. 그러면 어느 한쪽에 가깝게 설 수밖에 없다. 바깥이나 중앙에는 있을 데가 없다. 너도 나중엔 지금 관심 없는 것들에 화낼 수 있어.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게 맞으니까 열받는 거지. 그때 우리는 생각이 너무 달라서 서로를 보다 더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너답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최대한의 찬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 어제 퇴근한 그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가 평소와는 다른 장소를 제시하였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 두말 않고 갔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보고 일어나 큰 몸짓으로 환대했다. 웃으려는 찰나 정류장 의자에 누가 앉아 있는 걸 봤다. 그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 했고 나는 목례했다. 예쁘고 어린 친구였다. 이미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는 통성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며칠 전 이부자리를 못 벗어난 그의 집을 습격했을 때 그 옆의 이불 더미를 사람인 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떠나서 그와 내가 만든 굳건한 세계에 누군가가 침범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그 서늘함이 떠오른다.

 

그와 오늘 저녁을 먹다가 그 친구에게 메시지가 온 걸 보았다. 근무 시간이 바뀐 탓에 그녀는 회사 밖으로 못 나가고 안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필요한 걸 부탁한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의 휴대폰에 그녀는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었고 그 일화를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를 독점하고 싶지만 그가 자유로웠으면 하고, 무엇보다 다른 여자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내 마음이 불안하지 않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나를 걱정한다. 내가 선물 받은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남자인 친구를 만날 것에 불편한 심기를 표한다. 아니, 그럼 친구를 십 년만에 만나는데 후줄근하게 가야 하나, 뭐.

미분당의 쌀국수는 육수가 진하고 살짝 매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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