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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216 mercredi

도르_도르 2020. 12. 16. 15:16

얼마 전에 만난 EJ는 최근 애인과 헤어진 소회를 밝혔다. "아쉽긴 하지만, 원래 없었던 것이고, 꼭 있을 필요도 없는 건데." 찬과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나에게도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어제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오늘 예정된 저녁 약속의 주인공은 친한 남자 동생들이 아니었다. 미분당 쌀국수를 먹었던 날 메시지를 보냈던, 내 생일날 찬이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려줬던, 그의 사진과 영상들을 그에게 잔뜩 보내던 바로 그 여자와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물증을 들먹이니까 그제야 사실을 실토했다. 실망스러웠다. 그가 너무 솔직해서 나를 불편하게 할지언정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초지일관이었다. 내가 싫어하니까, 내가 걱정할까 봐 그랬단다. 나는 상대가 싫어하고 걱정할 게 신경 쓰이면 안 하면 되지 거짓말까지 하면서 행동을 강행한 이유는 어떤 보상이 있기 때문이라 결론 내렸고, 그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술을 못 마신다. 그래서인지 술을 좋아하는 데다가 남자 친구들과 친밀한 나를 걱정했다. 남녀가 술 마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무던히 반박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성 친구와 술 취해서 논 경험이 없어서 이해를 못하나 보다(얼마나 재미있는데), 생각했고, 그가 경험 못한 영역까지 이해하긴 힘들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의 요청으로 아는 오빠와 만나기로 한 걸 당일 취소한 적도 있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남자 지인들과의 모임에 그를 초대하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좋아하고 잘 지내지만, 너는 정말 특별하다'는 차별화 전략과 진솔함을 무기 삼았다. 그와 생각이 다른데도 내 방식을 고수할 수 있었던 건 그 또한 내 입장을 들어주려고 한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술 마시러 가자는 이성 친구의 제안에 그는 마냥 신난 모습이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했잖아. 혼란을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내가 이성 친구들과 편하게 잘 지내는 걸 보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생겼나, 그에게 나는 뭐든지 말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상대는 아닌가 보다, 내가 쉽게 곁을 주는 사람은 아니지, 아니, 그러면 그에게 난 뭘까, 등등. 어쨌던 전처럼 그에게 애틋함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리를 뜬 나에게 그는 다시 돌아와 주면 안 되냐고 애원했다. 춥고 가방이 무겁고 일이 많다고 말하니까 예전의 나라면 그런 것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왔을 거라고 했다. 정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린 손과 묵직한 어깨와 지끈한 머리를 못 느끼는 게 아닌데. 아무리 새롭게 고생스러워도 상대를 편하게 위해줄 수 있다면 여타의 것은 아무 상관 없었던 건데, 이제는 나의 무리가 당연해진 건가. 그러나 모든 건 나의 선택이었고, 그만큼 돌려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잠을 하도 줄여서 수면 장애 수준이 된 것도 그가 좀 더 배려해준다면 나아질 방도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안 되더라도 현재 내 상태가 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뭘 잃고 얻는지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야겠다, 싶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있으니까.

그 친구는 어리고 예쁘다. 그녀가 찬에게 하는 표현은 우리의 연애 초기보다 더하다. 그는 만나자고 하면 나오는 나를 보면서도 관심 있다고 오해했는데, 먼저 만나자고 하는 데다가 내가 오빠에게 술을 사는 건 대단한 일이다, 나보다 선약이 더 중요하냐, 나한테 왜 단답이냐, 와 같이 자신의 존재와 자신과 찬의 관계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그 친구(내 친구도 아닌데 자꾸 친구라 지칭하기 민망하지만 그럴듯한 호칭이 안 떠오른다)의 어투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온몸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중이고, 그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가 그녀를 귀엽고 자기 기분을 좋게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겠지. 요컨대, 내가 예상한 보상의 실체는 그런 것이었다. 누구나 보기 좋은 외모를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게 싫을 리 없잖아. 그는 그 친구에 대해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한가득 받은 걸 처음 알았을 때 둘이 그렇게까지 친한지 몰라서 놀랐다. 기분은 좋게 만들지만 찝찝한 낌새도 함께 선사하는 그 친구를 그가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는 힘들었겠지, 하고 퍼즐을 맞췄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여자와 주고 받은 메시지를 지웠다. 나는 그가 그 친구를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기에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게 사소한 거짓말과 연결되니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고민 끝에 그에게 짜 맞춘 퍼즐과 기분을 알렸다. 그는 끝까지 '직장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친하지도 않고, 이직하는 마당에 이번 기회 아니면 다시는 만나지도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싫으면 만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면서 땀 흘리는 그에게 내 논리를 들이대면, 그가 몰랐던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까봐 그만뒀다. 그는 내가 조분조분 말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평소에 꿈을 잘 안 꾸는데, 어젯밤엔 악몽을 세 개나 꿨단다. 그렇지만 나는 내뱉고도 시원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어제 일이 생각나면서 문득 괘씸해졌다. 그는 약속이 미뤄졌다고 했지만 미룬 건 그녀 쪽이었고, 그건 다시 만날 여지가 있는 거잖아. 그에게 "그럼 만나지 마!"라고 말 못한 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거짓말을 들킨 그의 행위는 실제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불쾌함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운을 띄운 말에 그는 수긍도 반박도 하지 않았고, 내가 말한 보상이란 그저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사단이 있었음에도 순순히 약속을 미루는 건, 내가 직접 명령하지 않으면 그녀와 만나겠다는 거고, 만나고 싶다는 거잖아? 예의상 이직하는 헬스장에 운동하러 오라고 말할 테지만, 그렇게 멀리 가는데 설마 오겠냐고도 했다. "진짜 오면?"이라는 질문에 그가 뭐라고 했더라. 이제 그와 거리를 둬야 한다. 지켜봐야 한다는 걸 안다. 불편하다.

뭐가 어찌 되든 나는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내 사랑은 크고 고귀하니까 나를 상하게 하는 사람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된다. 원래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를 마음껏 위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하는지 봐야 한다는 게 속상하고 머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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