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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아픔만 남은 재택근무가 끝났다. 부서장은 이렇다 할 공지를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타 부서원으로부터 재택근무가 연장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빨리 접했고, 뭐, 큰 기대도 없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구부정한 허리로 몇 시간씩 있다가 밤이 되어 잘라치면 뻐근하니까 할라아사나, 우스트라아사나, 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 등을 열심히 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요가 동작을 해온 요기(Yogi)이고, 특히 허리가 제법 유연하다. 허리를 활처럼 꺾으면 시원해지고 통증이 줄어들 줄 알았다. 어제는 새로운 헬스장 등록 일정이 있었다. 찬이 얼마 전부터 그곳에서 운동하기 시작해서 주말에라도 같이 운동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등록을 마치자마자 허리가 아프다는 나의 말에 그는 단단하고 돌기 있는 폼롤러를 주면서 ..

그의 이종사촌 형과 그분의 아내에게 초대를 받았다! 지난가을에 처음 만난 언니는 임산부였는데, 한강에 비바람이 몰아치자 그곳에 모인 친인척 외 1인을 집으로 호기롭게 인도했더랬다. 언니는 선선하고 야무진 사람처럼 보여 단번에 호감이 갔다. SNS에서 본 아기는 너무 귀엽고 잘 웃었다. 순한 기질이 영상과 사진을 뚫고 나왔다. 찬은 나와 헤어졌을 때 아기를 만나 보고 홀딱 반하여, 나와 만남을 재개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사촌 형 댁의 문을 두드렸다. 같이 가서 아기를 꼭 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언니는 아기를 막 재우고 파스타와 피자를 대접해주었다. 6년 연애를 마치고 결혼한 커플의 여행 사진이 집 곳곳에 걸려 있었다. 가전으로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오빠(마음에 안 들지만 뭐라고 칭해야 하는지 모르겠다)의 ..
출근해서 일이 잘 안 되어 머리를 굴리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와 계속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배가 불러 좀 걷다가 빨래도 하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든 평온한 하루였다. 그렇게 속상함 메들리가 끝난 줄 알았으나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용할 걸 이용해야지, 어떻게 이 순진한 어린애를 이용하냐, 미친놈들. 그의 눈물이 불러온 건 분노였다. 화가 나서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쓰다듬기만 했다. 그게 그날 저녁 내내 느꼈던 교훈이라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나랑 헤어질 생각했던 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책했다. 다음 날 아침에 혼인신고를 하러 관악구청에 가자는 그에게 "안 돼,..
토요일부터 숙취가 해결되지 않아 몸져누워 있다가 그래도 W를 만나고 싶어 약을 사들고 음식점에 갔다. 약을 복용하는 간단한 행동도 정신이 혼미하고 눈물이 나서 잘 못했다. 가게 안 손님들이 때맞춰 다 나간 게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W는 나쁜 내 상태에 깜짝 놀라며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그가 제일 강조한 건 "찬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 말고 다해."였다. 나는 그리움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건 그를 만지는 것, 같이 밥 먹는 것, 안고 자는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동안 찬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가능할까 싶어 다른 누군가를 만지고, 같이 밥 먹고, 옆에 두고 자는 것까지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건 너무 꺼려져서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며, 시도에 성공했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과 키스를 했다. 아는 사람과도 했다. “할 수 있다!”를 육성으로 다섯 번은 외쳤다. 그렇게 외칠 때마다 찬이 나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생각하며. 미끈한 혀가 주는 감촉이 나쁘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놀랍도록 좋지 않았다. 아무개와의 접촉은 그저 그런 것이다. 닿는 게 의미 있으려면 좋은 감정이 기반되어야 한다. 개중 어떤 이는 향수를 시시때때로 들이붓는지 머리가 아팠다. 찬도 향수를 많이 뿌리는 편이었는데 왜 그에게는 늘 킁킁대며 코를 박았을까. 그를 잊으려고 별짓 다하고 있지만 잠깐 정신 팔던 순간이 지나면 더 큰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마음이 패인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죽었다는 생각도 오늘은 도움이 안 되네. 그는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16살,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18살 때 그와의 관계가 곤두박질쳤다. 나는 책을 폈다. 열심히 공부했고, 쉬는 시간엔 독서를 했다. 그의 친한 친구와 도서관에 갔고, 그 친구가 매운 냉면을 눈도 깜짝 안 하고 먹는 것에 감탄했다. 문제집을 풀다가 하루키, 쥐스킨트, 노통브, 정이현, 전경린, 박완서를 읽었다. 을 그와 처음 볼 때는 지루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슬퍼졌다. 어느 날 어머니의 차로 하교하다가 친구와 웃으며 걷는 그를 보았다. 두발 단속을 피할 요량인지 까까머리를 하고 여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샤워 부스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등교하고 자습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다하려면 슬퍼할 새도 없었다. 정말로다가 시간이 없었다. 입시 결과가 어찌 됐든 열심이었던 그 시기는 ..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 왔다. 이틀 연속으로 싹 씻고 곱게 화장하고 예쁜 옷 입어 본 건 참 오랜만이다. 목요일엔 저녁 7시 30분에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에 만날 이들 중 누군가는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감기는 눈 사이로 엉망진창인 집이 걸렸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빨래며, 건조며, 청소며, 정리를 마치고, 출근한 것이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피곤하기도 하고, 회사는 여전히 재미없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탈출구 삼아 퇴근만을 기다렸다. 아쉽게도 그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늦었고, 10시가 되자 가게는 마감했다.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음식이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아서 피자 한 조각도 다 못 먹었다. 자꾸 내게 야윈 것 같다고 했다...
보증금 대출이 엎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일단 계약은 성사되었고 큰돈이 필요하기까지는 기한도 있으니, 잘 준비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 갈 집을 구할 때처럼 절망적이진 않다. 어제 사주에 이어서 오늘은 상담을 받고 왔다. 힘든 일 극복에는 최적의 코스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건 진리이지만, 돈을 들이고 머리를 써서 해결의 시간을 끌어당기는 이 방법은 효과가 아주 좋다. 지금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어제는 같은 시간에 눈물을 주체 못했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이다. 어제만 해도 그가 그리웠고, 다시 만날 궁리를 했다. 오늘의 나는 바람 없는 깊은 바다 같다. 어둠이 깔리긴 했지만 물결은 잔잔하다. 그를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면서 가까워지고 싶던 욕망이 사라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