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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토요일부터 숙취가 해결되지 않아 몸져누워 있다가 그래도 W를 만나고 싶어 약을 사들고 음식점에 갔다. 약을 복용하는 간단한 행동도 정신이 혼미하고 눈물이 나서 잘 못했다. 가게 안 손님들이 때맞춰 다 나간 게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W는 나쁜 내 상태에 깜짝 놀라며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그가 제일 강조한 건 "찬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 말고 다해."였다. 나는 그리움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건 그를 만지는 것, 같이 밥 먹는 것, 안고 자는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동안 찬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가능할까 싶어 다른 누군가를 만지고, 같이 밥 먹고, 옆에 두고 자는 것까지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건 너무 꺼려져서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며, 시도에 성공했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과 키스를 했다. 아는 사람과도 했다. “할 수 있다!”를 육성으로 다섯 번은 외쳤다. 그렇게 외칠 때마다 찬이 나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생각하며. 미끈한 혀가 주는 감촉이 나쁘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놀랍도록 좋지 않았다. 아무개와의 접촉은 그저 그런 것이다. 닿는 게 의미 있으려면 좋은 감정이 기반되어야 한다. 개중 어떤 이는 향수를 시시때때로 들이붓는지 머리가 아팠다. 찬도 향수를 많이 뿌리는 편이었는데 왜 그에게는 늘 킁킁대며 코를 박았을까. 그를 잊으려고 별짓 다하고 있지만 잠깐 정신 팔던 순간이 지나면 더 큰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마음이 패인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죽었다는 생각도 오늘은 도움이 안 되네. 그는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16살,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18살 때 그와의 관계가 곤두박질쳤다. 나는 책을 폈다. 열심히 공부했고, 쉬는 시간엔 독서를 했다. 그의 친한 친구와 도서관에 갔고, 그 친구가 매운 냉면을 눈도 깜짝 안 하고 먹는 것에 감탄했다. 문제집을 풀다가 하루키, 쥐스킨트, 노통브, 정이현, 전경린, 박완서를 읽었다. 을 그와 처음 볼 때는 지루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슬퍼졌다. 어느 날 어머니의 차로 하교하다가 친구와 웃으며 걷는 그를 보았다. 두발 단속을 피할 요량인지 까까머리를 하고 여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샤워 부스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등교하고 자습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다하려면 슬퍼할 새도 없었다. 정말로다가 시간이 없었다. 입시 결과가 어찌 됐든 열심이었던 그 시기는 ..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 왔다. 이틀 연속으로 싹 씻고 곱게 화장하고 예쁜 옷 입어 본 건 참 오랜만이다. 목요일엔 저녁 7시 30분에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에 만날 이들 중 누군가는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감기는 눈 사이로 엉망진창인 집이 걸렸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빨래며, 건조며, 청소며, 정리를 마치고, 출근한 것이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피곤하기도 하고, 회사는 여전히 재미없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탈출구 삼아 퇴근만을 기다렸다. 아쉽게도 그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늦었고, 10시가 되자 가게는 마감했다.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음식이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아서 피자 한 조각도 다 못 먹었다. 자꾸 내게 야윈 것 같다고 했다...
보증금 대출이 엎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일단 계약은 성사되었고 큰돈이 필요하기까지는 기한도 있으니, 잘 준비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 갈 집을 구할 때처럼 절망적이진 않다. 어제 사주에 이어서 오늘은 상담을 받고 왔다. 힘든 일 극복에는 최적의 코스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건 진리이지만, 돈을 들이고 머리를 써서 해결의 시간을 끌어당기는 이 방법은 효과가 아주 좋다. 지금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어제는 같은 시간에 눈물을 주체 못했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이다. 어제만 해도 그가 그리웠고, 다시 만날 궁리를 했다. 오늘의 나는 바람 없는 깊은 바다 같다. 어둠이 깔리긴 했지만 물결은 잔잔하다. 그를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면서 가까워지고 싶던 욕망이 사라졌..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어 태블릿을 켰다. 전 애인이 된 찬에게 메신저를 보낸 직후이다. 내뱉을 때 기분 좋은 파찰음이 느껴지는 그의 이름. 종일 그의 성격, 그와의 관계,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가까운 사람들과 분석했다. 그가 투명한데도 속이 다 안 보였던 건 사실 하는 짓만 날것이지 솔직하지 않아서였다. 솔직한 건 대단한 일이다. 일단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걸 의심하지 않아야 하며, 심지어 표현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사라진 유년기를 생각했다. 아이가 아닌 아이의 삶. 그는 나를 아이로 만들었고, 때때로 그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늘 어른이던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리고 잘 놀아주던 그. 아무것도 이해할 필..
뭘 좀 하려고 안경을 벗었다. 그 김에 마스크도 벗었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그 김에 영양제를 먹었다. 어? 서랍에 레모나가 있네. 역시 상큼하니 맛있군. 마스크를 다시 썼다. 뒤이어 안경도 썼다. 아차, 아까 안경을 왜 벗었더라? 나는 5분 전에 안경을 닦으려고 했었다. 도통 업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자기소개서에 썼던 포부 가득한 지원 동기는 벌써 잊었다(따지고 보면 태초부터 구라였으리라).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뤄보려는 것도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부서 퇴사자들에게까지 동질감을 느낀다. 미래를 준비하기에는, 당장 안정적으로 다니면서 커리어를 쌓(는 것처럼 보이)기에는 나쁘지 않아서 주저앉아 있다. 지난달에 새로 온 팀장님은 아직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바빠서 ..
건강검진 때 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어제 분수에 맞지 않은 으리으리한 집에 가계약금을 걸었다. 중개사는 '아하리'를 안다는듯이 "아하!"를 즐겨 말했다. 누가 뭐래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Y는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우리는 대학생 때 합창단 반주를 함께 했었다, 와 같은 사적인 사연 앞에서는 그도 진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Y와의 시간은 즐거웠으나 그렇게 성실하고 다정한 Y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수록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사하면 아무리 내 조건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살더라도 우울에 빠질 나 자신이 보였다. 맥주 한 캔을 입에 탈탈 턴 뒤에 쓰러지듯 잠들었으니 깨어나서 머리가 맑을 리 만무했다. 임신과 관련 없는 일로 산부인과 가는 게 반가운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