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부터 숙취가 해결되지 않아 몸져누워 있다가 그래도 W를 만나고 싶어 약을 사들고 음식점에 갔다. 약을 복용하는 간단한 행동도 정신이 혼미하고 눈물이 나서 잘 못했다. 가게 안 손님들이 때맞춰 다 나간 게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W는 나쁜 내 상태에 깜짝 놀라며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그가 제일 강조한 건 "찬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 말고 다해."였다. 나는 그리움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건 그를 만지는 것, 같이 밥 먹는 것, 안고 자는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동안 찬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가능할까 싶어 다른 누군가를 만지고, 같이 밥 먹고, 옆에 두고 자는 것까지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건 너무 꺼려져서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며, 시도에 성공했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더 생각나서 나락으로 빠졌다. 우리는 집에서 5km 반경만 벗어나면 다퉜기에 멀리 데이트 나갔던 좋은 기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소소하게 장난치고 그가 나를 챙겨주고 진정시키겠다고 안아주고 맛있는 거 나눠 먹던 순간들이 망가진 비디오테이프처럼 마구잡이로 재생되었다. 그런 생각을 못 놓았던 건 '실현될 수 있겠다'가 기저에 있었는데, 내가 대단한 걸 원하는 게 아니니까 그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에 대한 감정이 있으면서 그걸 뿌리치려고 스스로와 싸우는 느낌을 그에게 받았기에 사람이 누군갈 좋아하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는 사실이 내 소망의 합리성을 더해주었다. W는 바쁜 와중에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며 다음 날 아침에 등산이나 꼭 가라고 말했다. 그의 정성에 난 다시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찬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술 취해서 연락할까봐 번호를 지우고 메신저엔 잠금을 걸어놨는데, 그런 날들은 잘 넘겼으면서 아주 또렷한 정신이 되어서야 다른 행동을 한 것이다. 그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안 된다고 했다(그놈의 "안되"). 그래서 그냥 잤다. 꿈에서도 그와 싸웠다. 내가 하지 말라는 짓을 그가 자꾸 해서 생생하게 화가 났다. 결국 화해는 했지만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깨어나니, 내가 답장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다는 걸 알았다. 일단은 산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음식물을 잘 못 섭취한 데다가 숙취의 여파가 남아있는 몸은 등산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다시 몸져눕게 되었다. 몸무게가 53kg 정도였다. 찬과의 연애 중 어느 날 60kg가 넘어 "나 이제 야식 안 먹을 거야!"를 선언했던 때와 비교하면 꽤 줄어든 체중이었다.
그와 연락을 이어가게 됐는데, '이렇게는 못 살겠다. 차라리 얼굴 한 번 봐서 그리움을 해소한 다음에 일상으로 돌아가겠다.'를 주장하는 나와 '보면 더 못 잊고 더 힘들다. 헤어지는 일을 다시 처음 단계부터 밟는 게 더 힘들다.'는 그가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섰다. 어쩜 헤어지는 방식도 이렇게 다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찰나, 그가 자기도 힘들고 보고 싶지만 내색 안 하고 꾹꾹 참는 거라고 실토했다. 사람 둘이 얼굴 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둘 다 꾹꾹 참고 있냐고! 그 길로 나도 모르게 그의 집까지 걸어갔다. 그는 집에 없었다. 향수 냄새가 나는 것과 운동 가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동하러 막 나간 것 같았다. 깜빡 잠든 사이에 그가 돌아왔다. 그는 놀랐다고 했지만, 그의 입꼬리는 도무지 내려갈 줄 몰랐다. 나에게 가장 처음 한 말은 "코에 필러 맞았어?"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신기한 그가 나를 요모조모 뜯어봐주는 눈길은 좋았다. 나는 목적 세 가지를 말했다. 그는 헤어졌는데 그런 요구를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말했지만, 그중 만지는 건 괜찮다길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엉망인 내 상태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같이 자는 건 원하지 않는다길래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기분이 훨씬 낫고 얼마간 해소도 된 느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워서 음악을 듣는데, 찬에게 연락이 왔다. 연애할 때 우리가 너무 달라서 힘들었지만, 실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다시 잘 만날 수 있을지를 내게 물었다. 도대체 왜 여태껏 이상한 말들 내세우면서 헤어진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망설였다. 그와 있고 싶은 건 맞지만 이 관계를 잘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안고 잘 찬이 필요한 거지, 든든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함께 성장해 나갈 만한 애인이라고 그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아주 많이 원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기도 했다. 그는 차로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다른 동네에 갔다가 다시 나를 보러 그 거리를 돌아왔다. 피로에 덮인 그가 자신에게 잘해줄 거냐고 물었는데, 너무 귀여워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가까이 살지 않을 것이고,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질 것이다. 적당한 거리가 생기면 우리 관계도 전보다 원활해질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이제 나는 그가 어떤 역할은 아주 잘 해내지만 어떤 역할은 전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괜한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하는 게 있긴 하니까 거기에 집중하고, 다른 것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충분하겠지. 그와 헤어질 줄도 몰랐고, 그 뒤로 지독하게 힘들 거란 것도 예상 못했고, 그와 다시 만날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 못했는데, 그런 일이 지난 2주일 동안 다 펼쳐졌다가 끝맺게 되었다. 어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부딪혔다. 그 결과, 혼자 있는 것도, 다른 사람도 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