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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20923 vendredi

도르_도르 2022. 9. 23. 23:00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독서 모임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밤새 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커뮤니티에서 영양가 없는 글을 읽다가 아침을 맞아버린 나는 친구가 출근 준비하는 시간에 눈을 감았다. 스팸 전화에 깼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파트타임 상담원으로 원서를 썼던 한 곳에서 서류 합격되었다는 문자와 함께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작성한 원서였건만 풀타임 일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기에 그 연락이 달갑지 않았다. 시간을 헛되이 왕창 썼다는 사실만 한 번 더 상기되었다. 강의도 들어야 하고, 아직 서류 합격 연락은 못 받았지만 지원했던 전일제 직장의 면접도 미리 준비해야 하고, 어제 짠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퉁퉁 부은 얼굴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씻고 치장해야 하고, 조금 남은 책도 다 읽어야 했다. 면접을 보러 가지 않겠다는 회신도 해야 했다. 머리를 어지럽히다가 장을 보러 나갔다. 어제부터 해동시킨 닭가슴살이 있었기에 채소를 좀 사고 싶었다. 양파, 애호박, 바나나, 달걀 등을 샀다. 마트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활기가 느껴졌다. 밖은 약간 쌀쌀했다. 여름은 진작에 끝나버렸는데 나만 아직 반팔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했는데, 요즘에는 더 긴장된다. 씻다가도 지난 번에 대답하지 못했던 면접 질문을 떠올린다. '상담받던 내담자가 지금 자살하려고 한다는 전화를 걸어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머리를 굴리지만 지난번보다 더 적당한 답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렇게 긴급한 상황이라면 매뉴얼이 제공되어야 할 것 같은데, 에서 생각이 흐려진다. 밥을 다 먹고, 못 감은 머리를 질끈 묶었다. 가장 좋아하는 투피스를 입었다. 새로운 계절에 처음으로 스타킹을 꺼내 신었다. 늦을 게 뻔했지만 화장을 했다. 찍어 바른다고 특별히 달라질 게 없는데도 나의 맨 얼굴을 나조차 무시한다. 『지상의 양식』을 읽으면서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나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게 과연 내가 원하는 충만한 삶과 일치하는지 궁금했다. 씻기도, 일하기도, 아침에 일어나기도 버거운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잘 사는 일의 반대편 같다. 인생은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시도하고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일의 연속이다. 일단 하긴 해야 하는 것이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어떤 분이 옷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다. 다른 분은 나에게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굳이 예쁜 옷을 꺼내 입었고, 이런저런 생각에, 심지어 일어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기운이 나지 않은 것도 맞는데, 그런 말들이 위안이 되지 않았다. 특별히 무언갈 감추거나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었는데도, 함께 모여서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느껴지는데도 가슴이 두근댔다. 시간이 많으면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하는 법이다. 찬과 함께 있으면 잡생각이 가신다. 그게 정말 좋다. 얼마 전에 그가 나에게 성깔 있다고 평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착하다고들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말하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겁나지 않는다. 그가 이해하는 나라는 인간의 다양한 면면들은 내가 이해하는 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일들이니 재미있기까지 하다. 어느 날은 벌레가 싫다고, 사실 사람 빼고 움직이는 것들은 다 싫다고 하니까 그는 "사람도 싫어하잖아."라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누군가 "저는 사람을 좋아해요."라고 하면 의아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인간들과 잘 지내는 게 너무 중요한 이 세상에서 그들을 이해해 보고자 이 직업을 선택했을까.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내'가 있다. 나라는 존재, 나의 방식, 내 생각을 토대로 진짜 나 자신을 찾는다면 그건 무인도에서나 가능한 일 아닐까, 라는 생각. 개성과 인성은 함께 갈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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