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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10901 mercredi

도르_도르 2021. 9. 1. 20:58

C와는 여행지에서 알게 되었다. 그는 일행이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들은 내가 계획한 행선지와 숙소에 같이 가기로 했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닮아 있었다.

C는 아기를 갖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의 목적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휴대폰 화면에 빛이 들어올 때면 그의 오랜 애인을 볼 수 있었다. C는 가끔 무서운 목소리로 “아, 또 시작이네.” 혼잣말을 했다. 휴대폰이 불나듯 울릴 때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의 애인은 그와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처음을 함께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기어코 오곤 했다. 말로 정리가 안 됐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감동적이라며 그가 눈물을 흘렸을 때 나는 웃었다. 티브이 속의 누구도, 집 밖의 누구도 내 알 바 아니었다. 결말은 예상대로였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라 골머리를 앓던 나보다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다정했다. 과일을 깎아 주고, 옷을 개켜 두었다. 다정한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깔보았지만, 막상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졌다. 날 즐겁게 하는 건 그의 곤란이었다. 그가 날 위해 내어 주는 시간과 공간은 따뜻했지만, 실은 차갑고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한 움큼 집은 모래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저 따뜻한 모래일 뿐, 흐르는 걸 막을 방도는 없었다. 아무것도 제안할 수 없고, 아무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조금도 솔직할 수 없는 나는 위기에 빠진 그가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모든 걸 물리치고 제자리로 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도 <이터널 선샤인>을 보라고 추천한 건 기도 안 찬다.

C를 그 뒤로도 힐끔힐끔 보았다. 그의 결혼 사진도, 그의 아기가 막 태어난 것도 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 결혼할 남자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 말과 함께 휙 돌아서며 그의 코를 눌러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제대로 살고 있는데, 예전과는 달라졌는데, 너는 뭐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변함없이 다정했기 때문이다. C의 아이는 벌써 걸어다닌다. 아이는 그와 사진으로만 보던 애인을 반반씩 닮았고 무럭무럭 크고 있다. 종종 잘 지내냐는 질문에 인류애를 느낀다. 식겁한 난관을 함께 견딘 사람.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 원하던 걸 이룬 거 아니냐고 서로에게 축하를 보냈다. 그에게 뭘 원한다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 축하받을 때가 아닌 것만 명확하다. 그도 자신의 결혼관을 내게 피력했다는 사실을 잊었을 수 있다. 생각나면 이불을 찰 만큼 부끄러운 기억일 수도 있고.

어차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에게 빠져든다는 것, 스물다섯에도 그게 뭔지 알았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알았다. 언제 가슴 아플지, 어떤 장소가 마음을 미어지게 할지 정확하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사랑이 너무 귀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의 관계에서 어떤 걸 가질 수 있는지, 못 갖는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는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할 때에도 사랑은 믿었는데, 이제 사람도, 사랑도 못 미더운 지경이 되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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