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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이번 달부터 일을 다시 시작한다. 활동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담당자에게 보내고, 슈퍼바이저에게도 인사 메일을 드렸다. 어느덧 출근하지 않은지 세 달차에 접어 들었다. 그동안 책과 영화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었다. 한눈 팔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병원에 꾸준히 다닌 끝에 계획했던 치료 과정을 마쳤고 이후에 운동도 차차 시작하고 있다. 비록 다음 주에 작은 수술이 예정되어 있긴 해도 시간이 있으니 잘 마무리될 거라 여겨진다. 일을 하지 않아도 커리어가 멈추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공식적인 직함은 갖추어야 하고 거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깊이 있게 인간을 이해하는 토대 위에서 내담자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다양한 자격증을 찔러 보고, 그에 따른 다양한 수련 방식을 경험하고,..
세상의 모든 책과 영화를 다 봤으면 좋겠다. 머릿속에 갖고 있다가 "나 이 책 읽었는데."라고 하면 "오, 나도!"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이 이해한 책의 면면을 경청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야."라고 하면 "나도 나도!"라고 하면서 당신의 재잘거림과 취향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당신이 해석하는 음악과 미술 작품을 들으며 당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예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지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당신을 이해해야 하는데.
2/20 『데카메론 2』_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은 이런 사족이 너무 웃기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주 호감이 가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지요. 2/21 『지상의 양식』_앙드레 지드 오늘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유혹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유혹들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2/22 『성』_프란츠 카프카 마치 여러 해 전에 일어난 일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가 하는 얘기를 들은 것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 자신이 그 일을 이미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해요. 2/23 『고리오 영감』_오노레 드 발자크 메모지 없어서 나름대로 만든 것..^^ 꽤 오랫동안 하루에 한 번씩 책 필사하는 걸 미루다가 벼락치기 업로드를 드디어 시작했다! 발..
2/13 『도플갱어』_주제 사라마구 자네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선생님. 2/14 『지상의 양식』_앙드레 지드 선량함이란 행복이 방사하는 빛에 불과한 것이며 내 마음은 행복하다는 것에서 오는 단순한 효과에 의하여 만인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2/15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_스티븐 핑커 나도 낙관하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죽음의 수용소에서』저리 가라 할 만큼 잔인하다. 처음이라 그렇겠지. 그치만 아직 1,000쪽은 견뎌야 할 텐데. 방금은 이 부분을 읽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영어 학원 선생님이 여학생들에게 지금 이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기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 선생님의 안경과 안 물어봐도 나 가부장적임이라고..
2/6 『도플갱어』_주제 사라마구 사족이 너무 많은데 심지어 감명 깊기까지 해서 몇 장 넘기다가 따라 쓰고 또 몇 장 보다가 따라 쓰고 있다. 감정은 우리를 걱정하며 내일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게 우리가 뭐랬어. 2/7 『고리오 영감』_오노레 드 발자크 자식에게 줄 재산이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가난이 무엇인가를 알았단다. 2/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_밀란 쿤데라 태블릿 구입 기념으로 최애 책에서 한 구절 가져왔다. 캡쳐한 데다가 구절이 짧아서 왕 크군. 이전에 써 봤던 애플펜슬보다는 쓰기 쉽지만 그래도 종이에 쓰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다.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게를 더할 것이고 짐으로 변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허리가 휘었다. 2/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_편혜..
1/30 『나귀 가죽』_오노레 드 발자크 몇 장소 빼고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지는 날. "(…) 악이란 어쩌면 격렬한 쾌락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관능적 쾌락이 악이 되는 지점과 악이 다시 관능적 쾌락이 되는 지점을 누가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 1/31 『타인의 의미』_김행숙 「침대가 말한다」 실은 나도 매우 특별해지고 싶은데, 안 될 걸 아는 게 기분 나빠서 안달 구경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은 쑥스러웠다. 뻔뻔한 마음에 못 미치는 수줍은 행동이 튀어나와 당황했다. 눈을 가리고 등을 보이고 대답을 삼가다가 그것도 모자라 옹송그림 끝에 부재가 있길 바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나는 나다 세상 세차게 주장하고 있는데도. 너는 왜 모든 문제를 내게 끌고 들어오는가. 오늘 ..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섬세한 도슨트를 듣고 햇살 내리쬐는 낯선 거리를 걸은 후였다. 그동안 제법 열심히 귀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달마다 보험료를 얼마 내는지, 양꼬치에 산초를 얼마큼 뿌리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는지, 얼굴 어디에 점이 있는지, 내일 뭘 할 건지, 방금 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게 되었다. 살았던 동네의 모습, 아버지가 위스키를 즐기신다는 것, 선호하는 음악, 요즘 보는 드라마, 몸무게, 술버릇, 관찰하고 계획하는 진지한 눈빛, 형제와 친한 친구들의 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애인과의 기념일이 언제인지도 안다. 그는 쌍꺼풀이 짙은 나에게 술을 따르며 외까풀을 좋아한다고 했다. 외까풀 눈매를 가진 모든 이가 갑자기 너무 예뻐 보였다. 그는 절대 하지..
오랜만에 찬과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무거운 짐수레를 끄는 느낌이었다. 수레는 가끔 움직였다. 나는 그를 보았다. 모자에 가린 얼굴 윤곽만 비칠 뿐이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음식이나 컵을 봤다. 더 이상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앞에 있으면 쳐다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냐는 생각도 그만뒀다.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았을까? 미움이나 원망은 이미 지나갔다. 종종 그를 필요로 하지만 요구가 전부 충족되냐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원하는 게 없다(뿌옇게 바라는 건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한데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슬픈 사건을 더해서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기...?). 잦은 부딪힘 속에서 당위성을 먼저 버렸다. 어떤 게 사랑하는 것이고 어떤 게 헤어질 만한 것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