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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014 mercredi

도르_도르 2020. 10. 14. 17:44

그가 운동 프로그램을 짜줬다. 어제 하체를 해서 오늘은 등이랑 팔을 하라고 했다. 어시스트풀업 15개라고 하면 뭘 들라는 건 같은데 뭔지 몰라서 찾아봤다. 돈 벌려는 사람들로 혈안인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 그닥이지만 이럴 때는 요긴하다.

오랜만에 들어간 유튜브에서 내가 선호할 만한 영상들이 떴다. 그중 '남자를 미치게 하는 여자'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내가 왜 그걸 추천 받았는지 자문했다. 익명의 다수에게 자기 생각 밝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연애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궁금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은 떠올랐다.

 

부모도 아닌 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다는 건 비현실적이기에 나름 실현 가능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하고 맞춰주는 간단한 프로세스였다. 그러면 그가 자신이 수용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길 거라 생각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날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보다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아닌 모습을 가장하면서도 그 애정이 지속되기를 원하던 어린 나는 고집은 커녕 주장도 없었다. 그 굴욕감으로 혼자 있을 때는 안도감이 들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받는 애정만 강조했지 내가 뭘 주는지는 불친절하게 설명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머릿속에서는 합리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을 깎아 먹었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있는 나에게 그 사람이 미치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옆에 있게끔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받는 사랑도 좋긴 했다. 그러나 불쾌한 한 구석을 해결할 수 없었다. 불쾌를 해소하려면 판을 다시 짜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일기장에 불이 났고 눈물이 났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미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같이 있어도, 혼자 있어도 마음의 온도가 일치한다. 해결 안 될 문제도 일단은 말하고 들을 수 있다. 어찌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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