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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1103 mardi 본문
결혼하는 꿈을 꿨다. 곧바로 "나랑 하는 거였어?" 질문이 돌아왔다. 약간의 고민 끝에 "응"이라고 했지만 신랑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객이 많았는데, 잊고 지내던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이 등장했고, 중 1때 친했던 KD가 소동을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번잡스럽고 뒤숭숭했다. 머리를 굴려보니, 아무래도 <황제의 딸> 인물들의 혼사가 자주 거론되고, 조르바 지인들의 결혼 소식과 조르바가 부케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으며, 결혼주의자 찬의 일상적인 결혼 및 동거 제안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서 꿈에서 결혼식을 올렸구나, 결론 내렸다.
업무 중 심리학자들의 소속을 대거 찾을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분들의 글을 보게 되었다. 흥미롭고 따스한 내용이 많아 가까운 이들에게 추천하며 mind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그가 아프다고 하였다. 일요일에도 체해서 약 먹고 손 따고 난리였는데, 또 속이 안 좋고 몸도 으슬으슬하단다. 아프면 환자 본인이 제일 손해인 건 모든 이가 그렇지만, 휴가나 연차 개념이 없는 데다가 일하는 만큼 수입을 올리는 그는 여러 가지로 더 난감해진다.
퇴근 후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얼굴이 백지장이었다.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최고씨의 말처럼 그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나, 싶었고, 도대체 뭐 때문인지 원인을 찾기에 바빴다. 오늘 점심 식사인지, 어제 저녁 식사인지, 식사 속도인지, 음식물 종류인지, 그걸 알아야 다음에는 안 아프도록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는 힘없이 웃었다. 배고플테니 식사하고 오라고 하였다. 이어폰 빌려줄까, 음악이라도 들을래? 물었지만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하여 아무것도 못 주고 집으로 갔다.
후다닥 밥 먹는 도중에 몇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약속이나 한 듯 이름이 모두 한글이었다. 작년 초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면서부터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은 알파벳으로 저장명을 바꾸었다. 시계가 한글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 이름은 평소에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시답잖은 이야길 하거나 만나자고 했다. 그중 D가 있었다. 서울 출장이 잡혔다고 일정을 맞춰 보잔다. 그에게만큼은 반가운 마음으로 승낙하였다. 대학생 때의 별명으로 나를 불렀다. 다섯 살은 어려진 것 같았다.
병원으로 돌아가니 그는 여전히 링거를 맞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이불을 덮어서 오직 손만 보였다. 그의 손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은 BM과 술 약속이 있던 금요일이었다. 만취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근한 나에게 그가 갑자기 다음 날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한다며 발을 뺐다. 망연자실했으나 일단은 만나기로 했다. 미안했는지 그는 (고시생 차림에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깬 듯 잠기고 머리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으나)내가 사는 동네로 왔고, 우리는 음주 없이도 즐거운 대화가 가능하단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며 초밥과 수플레 케이크를 즐겼다.
찬은 나의 트레이너 선생님이었다. 당시 헬스장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문을 닫았다. PT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고, 나는 초심을 지키려 섭취한 음식물과 홈 트레이닝 현황을 꼬박꼬박 그에게 보고하였다. 카드 긁을 때 "나를 최대한 괴롭히고 이용한다고 생각하세요!" 했던 그의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하던 술 약속이 취소되어 아무거나 먹은 사실과 대충 한 운동 내역을 그에게 알렸는데, 아쉬워 하는 것 같다(?)는 의외의 피드백을 받았다. 그가 만나자고 했다. 자기도 코로나19 때문에 준비하던 대회가 다 취소되어서 술이 당긴다나 뭐라나.
깊은 밤이었다. 그가 어떤 술집을 추천했는데, 찾아보니 사장님이 가게 문을 닫고 귀가까지 마쳤을 만큼 늦은 시각이었다. 두어 차례 다음에 좀 더 일찍 보자고 거절했으나 그가 혼자라도 마시겠다 고집을 부려서 결국 내가 아는 가장 늦게까지 하는 가게인 '다이조부 니'로 그를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은 집에서 30초 만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출발점에서는 지척이고 그의 집에서는 도보 20분 정도 소요되니 거리가 있지만,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그에게 영업 중인 근방 술집을 소개해주고 함께 자리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은 그라고 생각했다.
양심 상 가게에 먼저 도착하였다. 손님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얇은 코트를 입고 덜덜 떨며 그가 들어왔다. 향수 냄새가 진했다. 내가 여기 왜 나왔을까. 마스크를 벗고 처음 본 그는 내 생각보다 너무 앳되어서 나이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몇 살인지 맞춰 보라고 했다. 나는 시종일관 깍듯하게 굴고, 와, 제 동생이랑 동갑이시네요, 이런 말을 곳곳에 배치하면서도 꽤 늦게까지 있었다. 그게 예의 바르고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귀결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는 가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지만 기분을 망칠 정도로 불쾌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성숙하거나 반듯한 사람이라고 느껴지진 않았고, 미소가 어정쩡하고 어색한 것도 영 별로였다. 그는 웃음이 많은 나를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이유도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 하지만 N의 말대로 착하게 보인다고 착한 게 아니라, 겪어 봐야 진짜 그 사람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는데. 그때 유일하게 마음에 든 것이 그의 손이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솥뚜껑 같았고, 다 닳은 대갈마치처럼 세상 풍파를 좀 아는 모양새였다.
그로부터 약 여덟 달이 지나 늘어져 있는 그 손을 다시 보는데, 지금은 세상에 이렇게 순수하고 특별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너무 소중한 그를 오해했다는 게 미안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하고. 첫인상이 좋다는 건 아무튼 축복이야. 하지만 인상이 전부는 아니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