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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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101 dimanche

도르_도르 2020. 11. 3. 11:48

생일 선물을 미리 보러 백화점에 갔다. 애초의 계획은 구 연인(들)에게 받은 롱패딩 두 벌을 처분함과 동시에 커플 롱패딩을 새로 장만하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강남은 서울 사람들이 다 나왔나 싶을 정도로 북적였다. 가까스로 옷을 몇 벌 입어 보았다. 근래에 나온 롱패딩은 팔이며 등이며 충전재를 듬뿍 넣은 데다가 최신식 기술로 무게는 줄였고 손목에서 손바닥까지 감싸는 임시 장갑(Y의 옷을 참고하길)도 달려 있어서 한 벌로 등반도 가능하겠다는 인상을 줬으나, 등산을 강요 받는 미쉐린이 된 것 같았다. 착 감기는 맛이 없다고나 할까. 답답해서 벗어 버리고 싶었고, 저 커다란 40만 원짜리를 어디에 수납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입던 거 버리면 공간 남잖아." 명쾌하게 말했지만, 내 옷장 사정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었다(전날 그의 개인 시간 선언으로 예정되어 있던 옷 정리는, 그가 날짜를 착각했다며 약속을 취소함에 따라 일정에서 사라진 터였다. 미안).
가민 매장을 발견하여 현의 시계 스트랩 구입과 배송 요청을 했다. 그가 현만 이득이라며 샐쭉거렸다.
살 만한 물건은 없고 사람들 틈은 갑갑하고 배가 고파졌다. 추천 받은 <묵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내부에 자리가 있는지 살피는데 앉아 있는 여자 분이 너무 예뻐서 깜짝 놀라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앞에 또 그만큼 예쁜 분이 있었고, 그 옆 탁자에도 그랬다.

압구정로데오역은 갈 때마다 다른 세상 같다. 깎아 놓은 듯 어여쁜 사람들뿐이다. 마스크 속에서도 미모가 감춰지지 않고, 얼굴이 보이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내 모습을 여러 번, 가까이서 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남인데, 남을 위해 내 살 파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좋은 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던 사람도 괜히 주눅 들고 불편하다.
아름다운 겉모습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나와 속도 다를 것이라는 환상을 준다. 외모가 뛰어나면 쉽게 환대 받는다. 환대가 아니더라도 모든 게 쉬워질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나도, 너도, 모두가 아는데, 나는 가만히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잘 가꾸어 원하는 걸 얻는다. 의학 및 미용 기술의 발달로 외모 수정이 손쉬운 세상에서 도태된 기분. 특히 운동맨인 그를 만난 후 편함제일주의자로 거듭났기에 머리를 질끈 묶고, 헐렁한 옷과 운동화 및 패딩을 주로 착용하며, 화장은 커녕 세수를 생략하기도 하는 요즘의 나는 그들과의 차이가 더 컸다. 그는 그의 말만 따라 "어떤 사람은 평생 한 번도 구경 못할 몸"을 가졌으니(하지만 모든 사람의 체형이 다르니 따지고 보면 모든 몸이 그렇지 않을까?) 차림이 문제가 아니지만, 나는?
<묵전>은 과연 맛집이었지만, 식사는 편하지 못했다. 그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체해서 고생했다. 당장 빨아야 하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낙성대 <배할머니네>에서 파절이 삼겹살을 먹는다면 이 고까움이 씻기련만. 남들보다 못나서 기분 나빠진 게 우습긴 해도.

 

&amp;lt;묵전&amp;gt;의 도마 보쌈! 고기가 짱 야들야들하고, 김치는 굴 들어 있는 남도 김치.st

 


돌아와서 그가 어머니랑 통화하기 위해 다른 공간으로 갔다. 무슨 회사 지원의 적금을 들어서 2년은 다녀야 하고, 내년에는 경찰 공무원 준비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틀림없이 내 이야기였다. "내가 지금 딱히 뭘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 말씀드리면 어떡해! 내년엔 안 뽑을 수도 있어!" 광광하니까 그는 혹시나 잘 안 되면 어머니께 그 직렬 티오가 없었대, 하면 되겠다고 속 편한 소릴 했다. 그리고 지금 회사를 왜 계속 안 다니려고 하냐고 물었다. 이건 내가 정한 것도 아니고 내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다, 고 밑밥을 깔고, N/13을 설명해주었다. 제일 큰 이유는 급여이지. 열심히 일해도 그만큼 보상이 안 따르니까.
그는 압구정에 가면 명품을 휘감은 사람들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돈돈거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적 반항심이 높은 아이여서 조용히 부에 반하는 진로를 택하고 나아갔다. 그래도 돈은 계속 남아 있었다. 찡그리게 하기도 하고, 기쁘게도 했다. 연인 관계에서 돈은 특히 두드러졌는데, 누가 얼마나 어떻게 쓰냐는 문제는 마음을 표현할수도, 감출수도 있으며, 두 사람의 시간에 치명적인 영향도 미친다.
다행히 그는 자연스러웠다. 돈에 분노하거나 쓸데없이 매몰차지 않았다. 돈 자체보다는 그걸로 살 수 있는 경험과 가치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언가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듯이, 돈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롱패딩을 고집하지 않고, 작년에 가게에서 잘 맞는 걸 확인했지만 망설이다가 구입하지 않은 코트를 사주었다. 매우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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