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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1105 jeudi 본문
D와 약 3년 8개월 만에 만나기로 한 날. 안 하던 화장과 안 입던 코트를 장착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누군가(들)는 우려했으나 내 기분은 설레기 그지 없었다. D가 누구인가. 어리고 낙관적이고 자유롭던 시기를 전부 나눈 사람 아닌가.
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반대로 탔다가 다시 돌아오느라 진땀을 흘린 그가 씩씩거리며 가게로 들어왔을 때 너무 반갑고 웃겼다. "잘 지냈어?" 부산 토박이도 말투가 바뀌는구나, 감탄했으나 이후로는 전부 사투리였다. 변한 게 없었다. D도 나에게 그대로라고 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테마를 정해야 했다.
먼저 일 이야기. 그는 어느덧 5년차 직장인이고, 내년에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나는 프리랜서를 할 줄 알았단다. 비 온다고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던 그 시절, 밤에는 술과 사람들에 둘러싸였고, 낮에는 햇빛을 피해 누워 있었지. 그래도 D는 사교적인 친구라 나에게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과 지인들을 나누길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잊은 사람들과도 여전히 친밀했다. 예전 남자 친구의 딸 이름이 뭔지 알게 되었고, 나도 그가 궁금하다던 옛 연인의 거취를 뭉뚱그려 말해주었다. 일 이야기는 모두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10분 만에 넘어갔다.
우리는 서로의 애인이 우리의 만남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걸 눈치챘다. 비슷한 기간을 만난 지난 연애를 끝냈고, 이번 연애 또한 유사한 시기에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인들의 나이도 같았다. 그가 많은 걸 해주었던 지난 연인을 이야기 하자 나 또한 많은 걸 받았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어디 가서 이렇게 말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지난 연인과 왜 결혼할 수 없었는지 각자의 사정을 밝히며 이번 연애와 이어지는 오답 노트를 공유했다. 떠올려 보니 대학 시절 D와 함께했던 거의 모든 여자 친구를 다 보았더라. D의 연애가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패턴은 보이지 않았다.
엄청 큰 웃음 소리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의 차편 여부가 걱정되는 때가 되어서야 작별했다. 그런데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당황스러웠다.
찬을 만났다. D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내 기분을 알아챈 그에게 뭐라고 할지 이유를 궁리하다가 부끄러운 생각에 이르렀다.
별 볼 일 없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서울 언저리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게 언짢았다! 마스크 쓰고 지나가면 알아보지도 못할 사람들인데? 그들과 내 기분이 연관되는 게 이상했다. 나야 말로 원하는 대로 살아왔잖아. 그런데 그들이 왜? 왜냐하면 지금은 원하는 게 바뀌었고, 매일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인지. 무엇보다 추구하는 게 변했으면 그걸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달라졌구나,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대학에는 성실한 사람들이 많았다. 도서관에 가려면 오르막을 죽어라 올라야 했는데, 도착하면 진이 빠져서 '다시 안 와야지.' 다짐했던 나와 다르게 방학에도 매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늘 신기함의 대상이었다. 취업난이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학교 다니면서는 취직이 안 될 거란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아는 모든 동문은 시기 문제이지 결국 괜찮은 회사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일 년에 한 줄도 안 읽고, 나에게는 기억도 흐릿한 어떤 사건을 약 10년 뒤에도 술안주용 즐거웠던 일 카테고리에 넣어 놓고, 연애를 하지도 않으면서 전업 주부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들은 시험 기간엔 머리를 맞대어 공부하고, 잠을 줄여 영어 점수를 올렸다. 노력하면 이뤄지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였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몰라도 열심이었다. 나는 그게 안 됐다. 대입을 실패해서 대학교에 애정도 뭣도 없던 나는 저 멀리에 있었다. 그래도 나대로 다양한 책을 읽고, 극적이고 짜릿한 사건들을 겪고, 거의 쉼 없이 연애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 생활 중에 이직을 성공하는 것과 주거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하는 걸 원하는 사람으로 변모하였고, 생각 없이 산다고 치부했던 그들은 이미 내 현 소망을 다 이룬지 오래라는 걸 D에게서 확인하였던 것이다! D부터도 이미 아파트 분양권을 사서 몇 년 뒤에는 자가로 살 예정이랬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팍팍하게 사는 게 싫은데,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남은 삶이 나를 목메이게 할 터였다.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기 싫은 걸. 도대체 내가 왜? 지금도 충분하잖아.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매 순간 결핍이니까.
찬은 내가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놨으니 때가 되어 이행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다 이뤄도 충족이 될까?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었던 지난 날의 여유는 어디에서 나왔다가 어떻게 사라진 걸까? 사회에게 받은 것도 없는데 무엇을 돌려주려 했던 걸까? 한 몸 건사하기 힘들단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이곳이 서울이기 때문일까?
그는 자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했으나 그와 나는 전혀 다르다. 그는 지금 맡은 일도 잘 수행하고 있고, 다른 여러 가지 능력 또한 많다. 군필이고 나보다 어리다. 나는 속한 데가 없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혼자 무언가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사 생활에 만족하지도 않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찬의 눈을 보면 모든 걸 가진 것 같은데, 실은 필요한 게 너무나도 많다. 그래도 그렇게 기분 나빠할 거면 다음부터 D를 못 만나게 할 거라며 괜찮다고 과일 주스를 갈아 주는 그는 정말 소중하고 또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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