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했을 때 괄목할 만한 일을 했다. 시간 순서가 아닌 인상적인 것부터 기록을 하자면, C와 우리 집까지 걷다가 중간쯤 왔을 때 내가 말했다. 처음 봤을 때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시작은 연애를 막 시작한 친구들은 바쁘다는 말이었고, "연애 초기에는 다 그렇죠."라는 말에 나도 동의했고, 연애가 언제 끝났냐길래 연애를 막 시작한 내 친구를 가리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최근에 끝났다는 내 연애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미 다른 사람과 전 애인 토로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C에게 찬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어떤 말을 해도 안전할 것 같았다. 난 원래 연인이 될 확률이 있는 사람에게 전 애인 이야기를 하는 데에 인색하다. 서로에게 맘껏 환상을 갖고, 실망하고, 헷갈리는 그 시기가 알쏭달쏭하니 좋기 때문에, 환상을 깨뜨릴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C와는 그런 남자 대 여자보다는 인간과 인간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헤어졌지만 마무리가 잘 안 된다고. 그러니까 C가 "전 남자친구가 괴롭혀요?"라고 했다. 괴롭히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죽겠다고 협박하고 사과하고 정에 호소하는 등 갖은 수를 다 써서 괴롭긴 하다고 말했다. C는 전에 아는 동생이 그러다가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다며 그때 자신이 했던 조언을 말해 주었다. 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는데, 전 애인이 그렇게 아쉬워하는 거면 그만큼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맞다고 맞장구쳤다.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C는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평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고, 멋지다고 했다. 그 '멋지다'는 말이 트리거가 되어, 나는 사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육분석 때 현재 남자친구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으니까 만나는 거고 다른 사람 나타나면 금방 헤어질 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늘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실행하지 못했는데, C를 보고서 남자친구와 헤어질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C의 결혼 및 연애 여부, 심지어 성적 지향성도 모르지만, 다른 멋진 사람이 세상에 많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고. C는 성적 지향성은 뭐냐며 웃었다. 그리고 "제... 제가요?" 하면서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다고 했다. 그런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자주 들으시는 걸까?) 일하는 것에 의미가 더해진다고 덧붙였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긴 했지만,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고 있는 만큼 진심이 느껴져서 좋기도 했다. 뭐가 멋있었냐는 그의 질문에 목소리와 미소가 떠올랐지만 모르겠다고 외쳤다. C는 (나는 매일 생각하는 이 사실을 그는 전혀 몰랐던 것처럼)우리가 최근에 자주 만난 데에 놀라움을 표했고, 일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렇게 같이 따로 밥 먹는 사람은 나뿐이라고도 했다. 함께 갔던 그 행사도 나와의 약속이 없었으면 안 갔을 거라고 했다. C가 하는 말들은 전부 따뜻했지만, 그래도 그가 나한테 빠져 있다는 뜻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큰 인간들의 사려 깊음 같았다. 그렇지만 평소 추구하던 짜릿함에서 한참 벗어난 이 느낌이 의외로 싫지 않았다.
C와 시간을 보내면서 새롭게 안 사실들이 있다. C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동생이 있다. 함께 살다가 현재는 가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10~11월쯤 이사 갈 생각인데, 전세나 자가를 고려한다고 했다. 자가를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기반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아, 그리고 뭐만 하면 엄청 자연스럽게 다 계산을 해서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C의 MBTI는 INFP이고, 주위로부터 의심을 사긴 해도 스스로는 확실한 내향인이라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하고 집에 오면 기가 빨려 쓰러진다고 했다. C는 내적귀인을 잘하는 사람이라서(이런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어떤 일을 쉽사리 자기 탓으로 돌린단다. C의 최근 연애도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나이 먹고 잠수 이별을 당했다며, 내적귀인의 성향과 더불어 연애가 본인의 자존감을 쉽게 깎아먹는다고 했다. C가 나에게 이상형을 물었다. 난 뜸을 들이다가 나만 이해하는 연애가 지친다고,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를 원한다고 했다.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연애를 했는데(이 말은 안 해도 좋았을 것 같다), 정말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던 건 단 한 사람이었다고. 20년에 한 번이면 너무 적은 확률이라 자꾸 내가 뭘 원했는지 망각하게 되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을 반드시 만날 거라는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진짜 진짜 원하는 건 이해라고 말했다. C는 자기도 나와 비슷한 거 같다고 했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통도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 떠올리니 '심리학에 의거한 바람직한 관계 가치관'을 서로 피력한 것 같아서 웃기지만, 여자인 친구 관계를 질투하는 전 애인 때문에 고생했던 C의 일화는 내 생활과도 맞닿은 부분이라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C는 예전 애인이 남자인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클럽에 가는 것도 보내 주었다고 한다. 주변으로부터 그러면 안 된다는 피드백을 들었음에도. 자기는 연인이 있을 때는 이성과 단둘이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현 스코어: 나와 술 2번 마심^^). 그리고 이제는 예전처럼 그렇게까지는 못할 거 같지만 그래도 여자친구가 이성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같이 가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자신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그러니까 그런 소통이 선행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크게 동의하는 바였다. 나는 아무리 연인이라도 단둘이 충족시킬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니까 서로의 욕구를 존중해 주고 그걸 막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런 의도로 말했는데 말이 꼬여서 얼마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C가 주변에서 누가 뭐라 하든 자기 나름대로 관계를 구축해 온 게 좋았다. 사실 처음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남을 존중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C는 나에게 연애가 막 끝났는데 다시 연애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물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연애 자체에 질려 당장은 새로운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질린 건 예전 남자친구이고, 하루빨리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 그런데 이 질문을 돌려줬어야 했는데, 다른 이야기들 때문에 돌려주지 못했다. C가 연애 생각이 없는 건지 나중에야 궁금해졌다. 30분이면 걸어올 거리를 이야기 나누다 보니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우리가 만난 식당은 그의 집에서 도보 2분 거리였고, 나의 데려다준다는 제안을 거절한 C는 처음에는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밤공기가 좋아서 그렇게 1시간이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도 집이 너무 빨리 나왔다. C와 이야기를 더 못하고 헤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지저분한 동생을 참을 수 없어 함께 살다가 분가하고 말았다는 그였기에 "초대하고 싶지만 집이 엉망이라 안 되겠네요. 조심히 가세요."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집에 혼자 남았을 때 그가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이랑은 만나지 않으려 했다."는 식으로 말한 구간이 떠올랐다. 차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고 맥락 파악 이전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서, 나와의 만남이 망설여진다는 것인지, 같이 일하다가 친해진 이성 친구를 전 애인이 이해 못 할 때 답답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찬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교육분석에서 "찬이 불쌍하다."라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네가 더 불쌍하다."라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C가 내 친구처럼 웃을 줄 알았는데 되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며 그 말 들었을 때 어땠냐고 물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그렇냐고 되물었다고 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나는 대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니까 대화량이 적은 사람을 오히려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연인이라기보다는 반려동물 같은 사람이었다고. 그런 사람 만나니까 어땠냐고 C가 묻기도 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이렇죠."라고 대답했다. 나한테 혹시 예전 남자친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건 아니냐는 질문도 했다(이렇게 써 보니까 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것은 C가 많이 질문해서였군). 난 제발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게 빨리 정리되길 바란다고 했다. 처음에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으나 이제는 끝까지 자기중심적인 그 사람을 보면서 애정이 바닥났다고 말했다. 뭐, 여태껏 해 오던 방향과 다르고 이게 썸인지 동료 슈퍼비전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집 앞에서 헤어질 때 서로의 아쉬움이 느껴졌고, 그가 다음 만남을 기약해서 좋았다. 나는 지금 그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고, 나와의 만남을 고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굳이 미리 예측하고 상상하고 지레 겁 먹을 필요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흘러가는 대로 지켜 봐도 된다. 궁금하고 애매한 관계와 여름밤은 참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