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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0830 dimanche

도르_도르 2020. 9. 1. 16:28

관계에서는 익숙하고 편안한 요소가 쉽게 형성된다.

 

서로의 생활 패턴에 맞는 틀에 박힌 데이트 코스, 오고 가는 말장난, 각자 맡는 역할(ex. 치료자-환자, 가해자-피해자, 지도자-추종자)이 어느새 뒤따른다. 익숙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지겹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이냐하면은, 그 규칙이 뭔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로 인해 어떤 변화를 겪는지 기민하게 파악하려고 계속하여 더듬이를 세우는데, 제 3자의 눈에는 회오리에 휘적휘적 몸을 맡기는 모습이랄까. 안 떠내려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싶다(발길 닿는 어디든 황야 yeah).

 

우리도 굳어진 만남의 방식이 있다. 평일에는 주로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주말은 비교적 옵션이 다양하다. 특히 이번 주말은 그의 시즌 오프 후 맡는 첫 휴일이라 음식이나 운동 시간에 구애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를 맞아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친구나 연인끼리 카페에 가는 게 다른 이들에게는 소소한 일상이겠지만, 그와는 쉬이 누릴 수 없기에 소중하게 느껴졌다.

 

 

HOME SWEET HOME
후추로 플레이팅한 거 나만 웃긴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가 이 책이 재미있다며, 자신을 어서 주인공으로 만들라고 윽박질렀다,,,^^

 

 

 

그가 다섯 개가 넘는 내 베개들 중 하나를 유독 마음에 들어하였다. 하지만 그거 예전 남자친구가 준 거야, 말하니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집 정리해야겠다, 라고 하길래 깨끗한데 무슨 정리?, 하고 물으니까 그 녀석(순화어)이 준 걸 모두 정리해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베개 말고 뭘 받았냐고 추궁했고, 그중 남은 게 무엇인지도 궁금해 했다. 동생이 준 스마트워치와 어머니가 주신 금목걸이의 출처까지 되묻는 그에게 뭐라도 설명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 그러기엔 억울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린 번갈아가며 하나씩 밝히기로 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
우리는 전연인에게서 각각 롱패딩과 신발과 가방을 받았다.
그는 롱패딩과 신발을 버렸(다고 했지만 이후 옷장에서 뉴발 롱패딩이 발견되었다)지만, 나는 유일한 롱패딩과 신고 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운동화인 그것들을 여전히 갖고 산다(심지어 운동화는 얼마 전 어머니께서 깨끗하게 세탁해주시기까지 함).
백팩은 우리 둘 다 소장하고 있다. 그 가방이 때 타기도 했고 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더 이상 손이 잘 가지 않는데, 그는 한 번씩 멘다.

그 밖에도 나는 시계, 지갑, 도서, 원피스 등의 의류를 받았다. 처음에 이 집으로 이사올 때는 샴푸, 물티슈 같은 생활용품까지 그득했다. 전부 당장 필요한 것 아니면 내 몸처럼 장착하던 거라 누가 준 건지 따지지 않고 이용하였다.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못했다.

그는 두 가지의 조건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옷은 무조건 버린다. 전연인과의 데이트 때도 분명 많이 입었을 옷이니 옷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날 수 있다는 게 이유이다.
두 번째, 고가품은 남긴다. 고가품은 10만 원 이상 여부가 기준이다. 받은 선물의 가격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딱 보면 안다고.

전연인을 떠올리는 게 나쁜가?
나는 그 사람이 남긴 것들을 오랫동안 정리했던 거 같다. 물건들은 그대로 뒀지만 내가 뭘 배웠고 잃었는지 열심히 되뇌었다. 하지만 아직도 깔끔하게 마무리하진 못했다.


애플워치는 어찌 됐든 살아남을 예정이라니 안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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