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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20701 vendredi

도르_도르 2022. 7. 2. 20:00

두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피곤했지만 설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날이 개었다. 처음 만난 피아노 선생님은 누가 봐도 음대생 같았다. 늦지 않게 갔는데도 총 5대의 피아노 중에 3대는 이미 차 있었다. 처음 왔다고 하니까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이전에 배워 본 적이 있는지, 악보를 볼 줄 아는지, 집에 피아노가 있는지 등을 물어보셨고, 나는 챙겨 온 악보를 보여 드렸다. 1악장과 3악장은 이전에 친 적이 있고, 나머지 악장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둘이 치는 곡이라 이전에 친 적 있다는 말에 내가 대회라도 나간 줄 아시는 거 같길래, 친구와 집에서 연주한 거라고 실토했다. 레슨의 힘은 강했다. 악보 보는 것도 엄두가 안 났던 2악장이었는데, 다목적실을 나가면서는 다음 주 내로 끝낼 수 있겠다 싶었다. 선생님은 50분 동안 5명을 레슨 하셔야 했고, 나에게 할당된 시간도 당연히 길지 않았지만, 내가 놓쳤거나 잘 안 됐던 부분들을 바로 짚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9시 50분이 되자 후다닥 한 층 내려 가서 스피닝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괜찮을지 의구심이 있었는데, 너무 신나고 옛 생각에 뭉클하기까지 했다. 처음 왔다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께서 수업 마친 후에 자세와 동작을 한 번 더 봐 주셨다. 꼼꼼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다. 무려 1년 4월이나 쉬다가 6월에 스피닝 수업이 재개된 거라고 하셨다. 기념으로 6월 마지막 수업 날에 빵을 나눠 주려고 했는데 오늘에야 준비했다고 먹음직스러운 빵을 수강생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셨고, 나는 하나 더 챙겨 주셨다.

 

2016년에 한창 스피닝을 했었다. 처음엔 시끄러운 음악과 화이팅 넘치는 분위기가 나와 맞지 않아 환불을 고려했다("엄마, 입간판에 나이트 수준의 음향이라고 적어 놨는데, 좋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어한다고 조금 더 다녀 보라는 어머니의 지지에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나갔는데, 일주일쯤 됐을 때 나도 그 재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 첫 스피닝 선생님은 20대 중반이었던 나보다도 두어 살 어린 남자분이었다. 대부분이 30~50대의 주부인 수강생들에게 선생님은 인기가 많았다. 매일 오전 9시에, 남들 앞에, 그것도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수업을 이끌어 가는 그분의 모습이 스스로를 사회불안장애 환자 아닐까 의심했던 그 시절 나에게는 대단해 보여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선생님이 내게 말 한마디라도 걸라 치면 도망갔다. 오전에 일이 있어 저녁 수업을 가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계시던 그분은 하루 종일 그 센터에서 사시는 것 같았다. 전 직장에서 살이 오를 때로 올랐다가 퇴사하고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어머니께서 다른 GX를 하시는 동안 나는 자전거를 탔다. 마치면 싹 씻고 피부 관리를 받았다. 요리를 하면 가족들과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여유롭고 안온했다. 시험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게 잘 안 되어도 절망적일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아버지 동료의 자녀 결혼식에 따라 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 동료 한 분이 내가 집에서 놀고 있는 걸 알자 앞으로 뭘 할 거냐고 여쭤 보셨다. 나는 자신 있게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재에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활짝 피어나고 있어서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별로 상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땡볕이 펼쳐졌다. 몸이 익을 것 같아서 걸음을 재촉했다. 예전처럼 가족과 먹지는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요리를 했다. 각종 채소들, 토마토, 닭가슴살을 볶고, 카레와 포두부를 넣어서 끓였다. 입맛에 딱 맞게 만들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안 칠 때는 지금 연습 중인 그 파트가 절로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퇴직금이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예상한 것보다 100만 원 쯤 많았다. 0.5/13인가 싶어 계산해 볼까 하다가 말았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다음 주부터 이행할 7월 계획표를 짜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는 시간도 늘리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기 위해서였다. <헤어질 결심, 2022>을 본지 얼마 지나지 않은 JJ는 아직 여운 속에 있었다. 생각보다 영상통화가 잦게 끊기고, 다음 주의 우리 각자는 종일 책상 붙박이인 것 같은데 서로 감시할 시간은 길지 않아서 몇 번의 시간표 수정을 거쳤다.

 

잠을 적게 잔 여파로 다음 주 금요일에 냉장고 AS 예약을 해 놓고 오늘 기사님이 오시는 줄 알고 한참 기다리기도 했고,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독서 모임에 20분가량 늦었다. 부랴부랴 간 카페에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낯선 얼굴도 있었다. 다들 모임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독서는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라서 내 책 읽는 데에 급급했고,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게 좋으면서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모임에 참석한다 해 놓고 당일에 잠수를 타거나, 채팅방에 들어왔으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투표도 하지 않거나, 책까지 빌려 놓고 슬그머니 채팅방을 나가 버려 앞으로의 생사 여부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모임원들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찡했다. 이 모임을 만든 방장님에게 루시드 폴의 '오, 사랑'을 불러 주고 싶었다(네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무언가를 잘 꾸려 가고 싶은 사람들이 내는 진실한 의견들 속에서 앞으로의 모임 윤곽이 잡혔다.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근육통이 걱정되어서 바로 헬스장으로 가서 한 시간 가까이 스트레칭을 하고 돌아와서 잠드려고 엄청 노력했다. 누워서 오늘 세수를 3번이나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괜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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