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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40821 mercredi 본문
바빠 죽겠는데 킹 받기까지 해서 여기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예식 날짜를 확정했다. 가능하다면 좀 더 따뜻한 때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돌려 더 일찍 예약을 하는 수밖에 없기에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한 것이었다. 모든 선택을 어떻게 다 만족스럽게 할 수 있겠나. 조건도 고려해야지. 그리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고의 선택을 했다면 그에 따른 만족감이 있기도 하다.
이럴 때가 아니긴 하지만 지난주에 경주, 포항, 대구에 다녀왔다. 컨디션이 계속 회복되고 있지 않아서 갈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많은 일정들을 다 취소하고 싶진 않았다. 그중에는 우리 할머니를 만나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C의 제안이었다. 지난 가족 모임에서 딱 한 번 뵈었을 뿐인데 C가 그렇게 챙겨 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할머니를 사랑하지만 할머니는 쉽지 않은 사람이다. 결혼까지 하는 마당에 그에게 우리 가족을 선보이기 부끄러운 단계는 아니지만 조금은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정말 많은 음식들을 챙겨 주려고 하셨고, C는 할머니가 어려워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나서서 할머니께 이것도, 저것도 다 괜찮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약간분의 김치를 얻었다. 김치는 3개의 아이스팩과 더불어 스티로폼 박스에 잘 싸여 있었지만, 집에 가는 내내 차에서 김치 냄새가 났다. 김치 냄새가 그렇게 지독한 줄 알았더라면 모른 척 할머니댁 방바닥에 놓고 왔을 텐데! 그래도 경주에서 학회에 참석했고, 학회에 참석한 C의 지인들과 식당 및 카페에 갔고, 워터파크에도 갔다. 포항에서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내 친구와도 만났다. 대구에서는 본식을 올릴 예식장에 갔고, 최신 예약 현황을 확인하여, 예식 날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이후 가족 및 지인들에게 예식 날짜를 통보했다.
어제 할머니께도 전화를 드려 예식 날짜를 말씀 드리니까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이제 집이 문제라고 하시길래, 집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문득 C가 말수가 없냐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셋이 같이 식사했을 때 말이 별로 없었다고 느끼신 것 같았다. C는 굳이 따지자면 말이 많은 축이고, 우리는 이런 직종에서 일하는 만큼 대화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서로 말을 많이 하며, C는 말도 말이지만 사람들 챙기는 것을 좋아하여 늘 그러느라 바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내 결혼식에 안 오신다는 것이었다. 신부 외할머니는 친할머니가 아니기에 결혼식에 참석하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하셨다. 할머니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힌 가부장제에 기분 나쁜 적이 한두 번 아니었지만 진짜 이건 또 새로운 빡침이었다. 할머니의 친/외 손자 손녀 중 아직 결혼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누구의 결혼식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을까 하다가 참고 꼭 오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끝까지 온다고 안 하고 생각해 보겠다 하심^^).
아니, 그런데 오늘 어머니도 통화를 하고 싶다길래, 예식 날짜가 언제로 결정되었음을 유선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렸는데, 다시 또 "식대가 얼마냐?", "날짜가 그때밖에 없냐.", "이제 와서 예식장 옮기긴 어렵지?"의 3 콤보를 맞았다. 5월에 이미 예식장이 결정되었음을, 날짜 선택의 폭이 좁음을, 그에 따른 식대 등 부가 비용까지를 안내한 터였다! 그 결정 과정에 당신도 같이 있었으면서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부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라, "여전히 안 싸우냐.", "여전히 결혼할 마음이 있냐." 등 나를 떠보나 싶은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는 할머니가 했던 말 그대로 C가 말수가 없냐고 그러시는 거다. 없냐도 아니고 "없제?"였다. 예상 가능한 그대로, 할머니가 어머니께 C랑 같이 밥 먹는데 말수가 없더라고 전한 것이었다. 어머니랑 C는 그래도 합쳐서는 세네 차례 봤는데, 예전에 셋이 만났을 때 C와 서로 대화 많이 하지 않았냐고(거의 어머니가 C에게 부부상담받는 급이었음), C가 할머니랑 처음 만나서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겠냐고 당연히 어른이시고 낯설고 하니까 어려울 거고 어렵지만 찾아뵙고 같이 식사하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예쁘게 봐줄 일이지!!!! 이런 식으로 말을 했지만 전화 끊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렸다. 궁금하면 질문하면 되는 거고 할 말 있으면 말하면 되는 거지, 무슨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한테 계속 농담이라도 던지면서 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해? 심지어 C가 말 안 하면서 뭔가를 회피하려고 하거나 무게 잡으려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데, 억울했다. C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뭘 그렇게 바라는 게 많은지 짜증도 났다. 심지어 할머니랑 만났을 때 계속 정적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서 대화하는 정도의 발화량 평균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분 나빴던 건 단편적인 모습으로 C를 평가하고 그걸 나에게 말한 것과 더불어 그걸 또 측근에게도 말하여 그 말이 나에게 전해지게 만든 점이었다. 할머니와 식사 이후 다시 할머니 댁에 데려다 드릴 때 갑자기 고추를 가지러 어디 가게를 들러야 한다고 해서 갔더니, 몇십 킬로 되는 빨간 마른 고추(얼마나 많은지 가격이 54만 원이었음)를 C의 차에 실으라고 하시던 할머니... 물론 도와드릴 수 있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미리 이야기를 해서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나..? 할머니 민망할까 봐 둘이 있는 데에서 다음부터는 미리 말씀하시라고 하려고 했는데 둘이 있을 기회가 없어서 놓쳤다가 쓰다 보니 생각났다. 그 일로도 C에게 계속 사과해야 했다. 결혼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내 가족의 못난 모습을 제3자의 눈으로 보기 때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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