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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30106 vendredi 본문
며칠 전부터 속이 부대껴 엄마가 호박죽을 쒀 주셨다. 서울로 돌아와서 그걸 냉장고에 넣고 나갔다. 속이 안 좋아서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약속을 청했고 나도 늘 그랬듯 마지못해 응했다. 홀가분했다. 이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정리에 힘을 쏟았던가. 이젠 평정심을 찾았고, 해야 하는 행동을 명확하게 알았다. 각본대로 하면 되었다. 안전한 즐거움이 확보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찼다.
그를 구경했다. 그를 구경하는 나를 관찰했다. 술이 들어가니 금방 메스꺼워졌다. 들었고, 지켜보았고, 맞장구쳤다. 오래는 못 있겠다 싶어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가게를 나서니 갑자기 눈이 펑펑 왔다. 센티해졌다. 눈 맞으며 따라 걸었더니 언제 그런 곳을 찾았는지 멋진 와인바가 나왔다. 사이좋게 노래 한 곡씩을 신청했다. 음질에 감탄하며 음악을 들었다. 술에서는 알코올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취했고 치댔고 도울 수 없는 영역 안에서 갈등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속이 편해지고 분위기에 젖었다. 그는 이해받길 원했다. 나 또한 시늉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아픈 부분을 보였다. 자신이 어떻다는 말을 할 때 왜 그런지 묻지 않았던 나에게 스스로 옷을 벗어 가장 연하고 다치기 쉬운 맨살을 드러냈다. 심지어 자기 아픔을 봐 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게 나에게는 너를 알아봤다는 말처럼 들렸다. 우리가 적당히 어떤 역할을 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머리로는 그가 나를 이해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줄 아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너를 이해한다. 너를 이해한다는 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 이 상황을 철저히 분석해서 부모상담하듯 스크립트까지 짠 나를, 뭘 감추고 뭘 말할지 단단히 계획하는 나를, 전시회 보러 가자는 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예약 사이트를 들락거리지만 시간 안 된다는 말만 하는 나를, 판단과 배신으로 얼룩진 나를 그는 이해한다고 했다. 술이 깼다. 여태까지 한 정리는 소용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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