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일이 잘 안 되어 머리를 굴리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와 계속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배가 불러 좀 걷다가 빨래도 하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든 평온한 하루였다. 그렇게 속상함 메들리가 끝난 줄 알았으나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용할 걸 이용해야지, 어떻게 이 순진한 어린애를 이용하냐, 미친놈들. 그의 눈물이 불러온 건 분노였다. 화가 나서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쓰다듬기만 했다. 그게 그날 저녁 내내 느꼈던 교훈이라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나랑 헤어질 생각했던 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책했다. 다음 날 아침에 혼인신고를 하러 관악구청에 가자는 그에게 "안 돼, 혼인신고는 평온한 상태에서 해야 해."라고 말했으나 그는 평온해졌다고 반박했다. "지금 혼인신고하는 건 내가 너 이용하는 거야. '이거 봐봐. 넌 세상에 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지? 내가 전부지?' 이러는 거라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에는 새끼손가락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한 번 헤어진 이후로 언제든 그런 일이 다시 닥칠 수 있음을 알고 대비하려는 나에게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그는 반지를 맞추고 싶어 했다. 운동할 때도 절대 빼지 않을 반지. 중량 치다가 반지에 손가락 집혀봐야 정신 차리지, 싶었으나, 그때도 보기 좋게 입을 다물었다. 약속이고 반지고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이번 달 카드 값과 곧 계약이 만료될 이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면 노트를 펴서 나의 재고와 할 일을 정리하느라 애인에게 코빼기도 안 보였을 텐데. 하지만 입도 뻥긋 안 했다. 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애인이고, 그는 그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저녁밥을 안 먹은 그는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냈다. 내가 한 달 전에 넣어 두고 간 것이었다. "너와 헤어지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저 두유가 보여서 눈물이 났어." 하지만 오늘은 든든하게 두유를 다 마셨다.
내가 그에게서 안식을 원했던 만큼 그도 나에게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그 과정과 방식은 전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느낌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안을 때 정확하게 설명은 못해도 다른 사람에게 찾을 수 없는 특별함으로 마음이 가득 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