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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115 dimanche

도르_도르 2020. 11. 16. 11:22

금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몸져누워 있을 때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선언 이후 그에 관해 엄마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는데, 온종일 그를 생각하는 나는 엄마와의 대화량이 확연히 적어진 터였다.

엄마는 다짜고짜 선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해야겠다 싶어, 선보지 않겠다, 이유는 그렇게 하기 싫으니까, 그와 계속 만날 거다, 결혼할 건지는 지금 알 수 없다, 고 주어진 질문에만 대답했다. 엄마는 내가 당신 뜻대로 되지 않아 기분이 잔뜩 상한 것 같았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짧은 통화 뒤로 눈물이 제어가 안 됐다. 그는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제대로 알아보려는 마음도 없으면서 그가 해악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말하고, 나한테 짜증까지 낼 건 뭐람. 엄마의 그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이야기를 들은 조르바는 분노하였다. 조르바의 말을 들어 보니 내가 너무 가만히 있어 엄마가 나를 가마니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르바와 이야길 나누면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정리가 되었다. 그래도 대화의 기회가 언제 올까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토요일에 대학원에서 함께 수학한 S를 만났다. 그를 데리고 갔다. S는 원래 나이보다 10살쯤 어려 보이는 초동안이며,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 S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애인과 좋은 사이여서 부럽기만 할 뿐 다른 감정은 없었다. 자신이 변했기에 현재의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언니는 운이 좋았던 거 아니에요? 제 인생에는 그런 사랑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말도 했지. 하지만 근래에 엄마 사태를 겪으면서 S가 얼마나 용감한지 몸소 느꼈기에 한 달 전에 잡은 이 약속은 내게 시기적절했다. 어떠한 태도와 노하우로 연인과 같이 살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지를 열심히 들었다. S는 애인이 단단한 사람이며, 자신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해준다는 걸 그 관계에서 최고로 꼽았다. S는 찬을 경험 많고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평했고, 내가 찬으로 인해 편해 보인다고 했다.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레알)밤새 놀다가 지하철을 타고 왔다. 나는 그에게 어차피 결혼할 거면 내일 하자고 했다. 그는 날이 밝았는데도 피곤한 기색 없이 몇 년 뒤에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그 몇 년 안에 그가 이루고 싶은 것들과 결혼과의 상관관계에 수긍은 안 갔지만, S가 서로 협조적이어야 잘 산다고 했기에 다음 날 결혼하는 건 일단 미뤘다.

 

 

대망의 오늘, 책을 읽으려고 그와 카페에 갔다. 음료를 막 가져오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는 찰나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다음 주말에 아빠와 서울에 오겠다며 버스 예매를 부탁했다. 계획을 세우려고 부모님의 서울 일정을 물었다. 그런데 엄마가 일정을 말하다가 돌연 서울 사는 큰외숙모한테 내 중매를 부탁했다며 만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득했다. 그가 앞에 있는 것도 잊고 안 만난다고 하지 않았냐, 도대체 왜 그러냐, 고 했더니 걔랑 뭘 하는 거냐, 걔를 왜 만나냐, 왜 시간 낭비를 하냐, 와 같은 말이 돌아왔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다행히 밖으로 나갈 정신은 있었다. 엄마는 한 번 본 것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엄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그런 애 만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당신의 딸도 잘 모르는 엄마의 그런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도 온갖 편견으로 그를 대하지 않았냐, 내가 좋다는데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하냐, 엄마가 그런 시각으로 보는 그를 누가 좋게 말하겠냐,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남자 친구랑 잘 만나는 딸한테 다른 남자 소개해주려는 엄마 마음이 불편하고 이상하진 않냐(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엄마가 소개하는 누구에게라도 뭐라고 한 적 있냐, 엄마도 나한테 이럴 권리 없다, 내가 필요하면 엄마한테 좋은 남자 없냐고 소개를 부탁하겠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 등등의 말을 했다. 글로 쓰니 건조하지만 격앙되고 긴급했다. 급기야 엄마는 그와 헤어지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그를 사랑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와 함께 살자는 것도 아닌, '엄마는 나한테 다른 남자를 굳이 소개해 줄 필요가 없다.'였다. 상대가 필요 없다는 걸 위한답시고 강요하는 마음은 괴롭힘일 뿐인데 그걸 아직 왜 모를까?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엄마의 이유는 피상적이고 오해에 기반한 예측이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를 겪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를 끝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도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밖에 오래 있으면 그가 걱정할 것 같았다. 얼굴을 닦고 자리로 돌아와서 책을 폈더니 그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웃는 얼굴이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어차피 봐도 눈에 안 들어올 거면서, 라며 책을 부드럽게 덮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엄마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듣고 싶다고 했다. 둘러댈 말도 없었다. 엄마가 남자를 소개해준다고 한다, 사실 너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했다. 혹시 나중에 엄마와 그와 어떤 관계가 생긴다면 그건 순전히 나를 매개로 한 것일 테니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인 내가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성질내고 그에게도 미움 받는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나는 다 망치는 중이었다. 스스로 너무 초라했다. 안 그래도 진로 때문에 아버지와 의절하다시피 한 사정을 알기에 자기 일에 열심히인 그를 사람들이 좋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일 찾아서 열심히 하는 게 나쁘게 생각할 일이야?! 씨익씨익),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엄마가 이 모양이니 그에게 미안했다. 그는 우리 엄마 입장이 충분히 이해 간다고 했다. 그리고 내 기분이 나쁘겠다고도 공감해주었다. 그에게 우리 엄마가 밉지는 않냐고 물었다. 그는 나중에 "찬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도르에게 잘하는데, 내가 그때 잘 모르고 도르에게 다른 남자 만나라고 했던 게 미안하다."는 말을 엄마에게 들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했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도르네 엄마가 그렇게 말 안 했을 것 같다고. 그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출처가 우리 엄마라니 하염없이 부끄러웠다. 전날 S가 애인과 함께 사는 집이 자가임을 밝히며 그래도 집을 걱정 안 해도 되는 자신은 행운이라고 했을 땐 함께 돈을 모아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에게도 인정 받을 필요 없는 그가 우리 엄마 때문에 돈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거북한 일이었다.

 

나중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역시 차표 예매 때문이었다. 나는 시시콜콜한 인간 관계를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남자 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 만나보라는 엄마랑 싸웠다고 일러바쳤다. 아빠는 "큰외숙모가 그래도 너 위해서 해주는 건데...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 좋지 않나?"라고 했다.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서른 평생 나를 위한 적 없는 큰외숙모가 퍽이나 갑자기 좋은 신랑감 구해다 주겠다, 그런 사람에게 남자를 소개받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스럽다, 이렇게 두 가지였다. 아빠에게도 지금은 그런 식으로 누군갈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런 일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지 평범한 우리 집에서 벌어질지 추호도 몰랐다.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을 사람을 찾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인데, 아니, 그리고 이젠 내 문제이며 극복해 나갈 의지가 있지만 내가 진득하게 누군갈 만나기 힘들었던 건 양육자와의 애착 문제도 필시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누군가와 겨우 아름답게 사랑하는 걸 응원은 못해 줄 망정, 내가 부모님께 성혼을 선포한 것도 아닌 지금 그 사람의 가치 폄하에 반발하느라 에너지를 써야 하다니, 악몽이다.

 

결론은 비폭력 불복종 느낌으로 부모님에게 최대한 화내지 않으면서 하라는 행동은 거부하고, 그가 결혼하길 원한다는 2023년까지 계획한 것들을 서로 잘 이루기로 했다. 하지만 신혼 부부 특별 공급에 혹시라도 당첨되면 바로 혼인 신고할 테다(청약 통장 만드셈).

 

기분 풀기용 곱창도 먹었으니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순 없다. 내 기분은 내가 선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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