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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117 mardi

도르_도르 2020. 11. 18. 11:30

전날 점심때 엄마와 또 싸웠고,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어서 그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가 "언제 하지?"를 반복하던 집안일을 좀 해놓을 요량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통화 중이었다. 새 직장에 관련된 이야길 나누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그는 동료들이 한잔하자는 걸 뿌리치길 잘했다며 날 보고 반가워했고, 통화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평소 흠모하던 사람에게 함께 일해 보자는 제안이 왔단다. 그 사람이라면 신뢰가 있어 같이 일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고 성장도 빠를 거라며 일대의 기회가 왔다고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들뜬 어조와는 다르게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잘 못 자고 이른 점심 식사를 한 그는 날이 어두워지자 피곤하고 배고프다며 힘들어했다. 상사와 카페에 한 시간 동안 있었는데, 그 뒤로는 눈에 띄게 기분도 나빠 보였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일하다 겪는 일들을 웬만해선 넘기는데, 심상치 않았다.

그의 일터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었기에 그와 함께 일하는 모든 이가 나를 그의 연인인 줄 안다. 대회를 나가거나 할 때에는 그의 동료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에게 스트레스를 준 상사는 내 눈에는 유들유들한 사람이었다. 내게 어떻게 그를 만날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나이가 어린데도 흑백이 분명하고 쉽게 굽히지 않는 그를 다루기 어려워하는구나.' 싶었지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거의 매일 만나는 우리의 연애 행태가 그의 직장 동료들의 호기심을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도 모르는 그들에게 관심 없었고, 몸이 안 좋아 운동을 쉬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 존재들을 망각한 터였다.

상사는 어제 직장에 직원들이 새로 와서 갑자기 성사된 술자리에 그가 불참한 일로 입을 뗀 모양이었다. 그는 회식은 미리 일정을 공지해야 하지 않냐, 도르랑 코인 세탁소에서 빨래를 하기로 해서 못 간다, 진실만을 말하고 집에 그냥 와 버렸고. 그걸 들은 상사는 말했다. "도르가 네 인생을 책임져 줄 거 같냐?", "도르가 너한테 용돈이라도 주냐?"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거기다가 "나니까 너를 이렇게 끌고 가는 거다."를 듣자 그는 그곳에 여태 자신이 기여한 것까지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다.
내막을 들으니 서글펐다. 가까운 이는 "제발 헤어져!"를 외치고, 거리가 있는 사람은 '어차피 와해될 관계'로 여기나, 우리를?

일단 그를 달래서 무엇을 제공할지 살폈다. 아주 맵거나 느끼한 게 당긴다고 했다. 매운 건 속 버릴까봐 체다치즈 파스타를 주었다. 몇 입 먹지도 못했다. 대화를 나눴다. 그는 원래 내년 초까지 현 직장에 다닐 예정이었는데, 당장 다음 달에 나오겠다고 이를 갈았다. 퇴사 후 일주일 정도 쉬면서 매일 우리 회사 근처로 와 나랑 점심을 먹고 싶다고 했다. 자기는 진짜 나뿐인데,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해서 너무 화난단다. 나에겐 책임감과 용돈의 여부가 별 힘이 없지만, 그는 내가 떠날까 봐 두려운 마음과 경제적으로 성공하고픈 욕구가 있어서 상사의 그 말들이 더 자극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이의 말까지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이직은 충동적으로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 봐라, 복수를 하려면 네가 앞으로 잘되는 것도 좋지만 당장 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걸 다 빼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인생은 서로 책임져 주는 걸로 하고, 용돈은 네가 성공하면 나한테 주기로 하자(매달 50만 원씩), 오늘 조르바가 내가 편해 보인다고 이전과 달라졌다는 말을 했는데 네 덕분이라 생각한다, 난 그대로 있을 거다, 그런 말들을 했다. 그는 "피곤해 보인다고는 안 해?" 물었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가 책꽂이를 보면서 자신을 끈기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책도 다 읽겠다, 일기도 매일 쓰겠다 했는데, 지키지 않는 자신을 자책했다. 그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는 게 마음 아팠다.


둘 다 밤새 뒤척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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