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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1019 jeudi

도르_도르 2023. 10. 19. 11:14

어제 충동적으로 C의 집까지 갔다. 우리가 북리딩하기로 했던 책이 C의 집에 배송 와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 책이 말하는 치료법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러이러한 부분이 이해 안 된다고 말했더니 C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 말했다. 하지만 아직 책을 보지 않은 그는 나의 요지를 파악하기 어려워했다. 대답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지적할 순 없었다. 관계성과 전문성뿐만 아니라 경제성에 있어서도(그까지 가는 데에 쓴 시간, 돈, 에너지를 고려해 보라!) 지적은 비효율적인 처사였다. C의 설명이 길어지다가 갑자기 상담의 목적이 뭐냐고 나에게 묻는 구간이 있었다. 슈퍼비전 시간도 아닌데? 사람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그런 질문은 받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질문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했지만, 사실 듣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책을 보지 않고 감으로 설명하는 그의 말이 안 와닿아서 딴지 걸고 싶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내가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급격하게 피로해졌고, 책을 나중에라도 보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 반응을 보고 기분 나빴냐고 수그러들었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그 치료법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서문에 내면아이의 상처를 알고 치료하는 것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C의 옆에서 나의 내면아이에게 어떤 상처가 있는지 절로 느껴졌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이었다. 감정적 격앙이나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된 공격을 받을 때 목소리를 숨기는 것은 아이였을 때 부모님을 속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었다. 내가 무엇을 겪었고 겪는지 부모님이 아신다면 절대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면서 겪었던 가장 어려운 일이 드러났을 때 무너졌던 부모님의 반응은 나의 침묵을 강화했다. 우리 부모님은 직접적으로 나를 타인과 비교하거나 깎아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잘난 사람들을 들먹이거나 나를 뭐든지 잘하는 사람처럼 언급할 때가 있었다. 좋은 식으로든 나쁜 식으로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평가받는 게 지긋지긋했다. 열심을 다한다고 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라서 빈틈이 보일 때마다 포장하거나 비난하기 급급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간극이 웃길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유쾌하지 않았다. 타인이 나에 대해 갖는 기대감을 괜히 충족시켜 주어야 할 것 같은 실체 없는 느낌. 하지만 입을 다물 때에도 생각했다. 늘 생각하는 게 있었고, 그건 들리는 것과는 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도 않은 C가 나에게 자문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따라서 나의 질문은 학문적인 오류를 발견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호기심에 의거한 내용이었는데, 치료법뿐만 아니라 내 의도까지 놓친 C가 말을, 심지어 길게 늘어놓으면서, 질문을 통해 평가받는 기분까지 느끼게 만들자, 나는 나의 내면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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