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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1218 lundi

도르_도르 2023. 12. 18. 11:02

일이 쌓여 있으나 마음 정리의 필요성을 느껴서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요즘은 업무용 다이어리에 체크리스트 작성할 때 빼고는 글 쓸 일이 없었다. 슬프거나 속상할 때 일기 쓰기의 빈도가 늘어나기에 이건 좋은 신호였다. C는 여전히 귀엽고 엄청난 사랑을 말하고 당연하다는 듯 나와의 미래를 그리고 여태 알았던 그 누구보다 따스하다. 요리를 해 주고 반찬을 챙겨 주고 운전을 해 주고 집 앞까지 마중 나와서 집 안까지 배웅해 주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자다가도 애정 표현을 백 번 한다. 나의 의견과 감정에 관심이 많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매번 다르게 개사해서 불러 준다. 귀찮게 몇 번이나 다시 불러 달라해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또 불러 준다. 환하게 웃으면 귀여운 치아가 한가득 보인다. C는 나와 있는 게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하고 어떤 결혼 생활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어제 SNS에서 찬의 흔적을 보고는 울었다. 그리고 새벽 6시까지 SNS의 파도를 타고 다녔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었다. 다음 날 일찍 출근해서 다량의 업무를 소화해야 하는데 왜 잠드려고 하지 않는가. 왜 불면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면서 문제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회피하려고 하지. 친구가 환승연애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고 평했을 정도로 연애와 연애 사이의 간격이 짧긴 했다. 찬과 기약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는 게 실은 너무 홀가분했다. 그는 애정 표현에 서툴고 짜증이 습관이었지만 그와의 관계가 지금-여기밖에 없는 만큼 거기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그와의 미래를 간헐적으로 그려 본 적이 있었으나 내 무덤 내가 파는 것이라는 생각이 견고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헤어질 사이인 것을 늘 염두에 뒀다. 홀가분함이 주는 자유는 안정감과 연결되었고, 진정한 쉼이 되었다. 그렇게 휴식해 본 적이 없어서 찬과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쉼을 더욱 잃기 싫었다. C는 좋은 것들을 가득 제시한다. 대부분 내가 별로 꿈꿔 보지 않았던 미래다. 그런 미래가 나한테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주 오래된 경험과 연관된다. '단축된 미래'라는 개념을 배웠을 때 나는 수용했다. 자신 외의 그 누구도, 무엇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하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고 그 모습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성숙하고 멋진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자신과 함께인, 여태 살았던 방식과 다른 방식을 제안하니까, 자꾸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C는 뭐든지 혼자 짊어지지 말고 같이 하자고 한다. 나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진작에 저버렸고 원망이나 비난의 감정 또한 감췄다. 소용없고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타인을 용서한 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수월하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처리하려고 그들과 멀어졌다. 내가 진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인지 아무도 몰라 줬던 것처럼 이제는 스스로 꽁꽁 숨기기로 했다. C와 함께인 미래를 선택하면 부딪혀야 한다. 더 이상 다 내려놓고 쉴 수는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 과거와 만나서 회복에 이르는 징검다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상처에 좌절과 절망을 덧붙일 것인가. 생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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