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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1004 mercredi

도르_도르 2023. 10. 4. 14:06

요즘 진행하는 상담들은 꽤 어렵다. 주제도 주제이고 내담자로 많이 만나보지 않은 나이대와 성별의 사람들을 대하려니, 부족함을 느낀다. 이번처럼 긴 연휴나 주말에도 내담자를 문득문득 떠올린다. 그렇다고 대학원생 때처럼 상담 공부에 몰두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차피 나도 직장인이니까. 그래도 무거움이 가시진 않는다. 실은 오늘 오후에 있을 상담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마음이 안 잡혀서 정리를 해 보고자 일기를 쓰게 되었다.
 
연휴 동안 시력교정술을 했다! 20대 초반에 친구들이 하나둘씩 시작했던 걸 보면 그네들보다 10년 이상 늦은 것이다. 여기에는 C의 영향이 컸다. 단발병은 단발할 때까지 낫지 않는 병이다. 단발병에 걸리면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짜증 난다. 그런 것처럼 안경과 렌즈에 질릴 대로 질린 나는 라식병에 걸려서 라식을 해야만 나을 수 있었다. C는 검사라도 받아보라며 믿음직스러운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검사받은 날 스마일라식이 가능하다는 말에 수술 예약까지 잡은 나는 예정대로 무탈하게 수술을 완료하였다. 가격이 부담스럽긴 했으나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뭐, 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안경과 렌즈 없는 인생이라니 아직 실감이 안 나서 자꾸 렌즈를 빼려고 한다. 수술 이후에도 계속 안약을 넣는 등 관리를 해야 하는 건 번거롭지만, 점점 눈 시림이나 뿌연 시야가 나아지고 있어 신기하다. 맨눈으로 이렇게까지 잘 보이다니.
 
눈 수술 전에는 C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만났다. C에 대해 자신 있었다. 찬이 나보다 어리고, 우리 부모님 세대 때는 드물었던 직업을 갖고 있고, 보기 좋은 외모이나 어른들이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상(相)이 아니었기에, 나보다 나이가 많고, 한 분야의 전문가이고,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와 화술이 준수한 C를 우리 가족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C는 당장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각 잡힌 정장을 입고 선물 상자를 들고 우리 가족을 찾았고,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대화하려고 해서 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C를 보자마자 우리 부모님은 떨떠름해하셨다. C와 단둘이 남았을 때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받으려고 했으나 뭘 잘못 눌러서 통화 연결이 되었고, 부모님은 실제로 C가 마뜩잖다는 뜻을 내비쳤다. 내가 아깝다는 식이었고, 결혼은 잘해야 한다며 좀 더 신중하게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했다. 정말 갑갑했다. 더 안 좋은 소식은 C가 내 옆에 있었기에 이런 기류를 눈치챈 것이다. C에게 우리 부모님이 더 훌륭한 분들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거북하고 민망했다. 우리 부모님은 그야말로 평범한 분들인데, 자녀가 데리고 온 애인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며 수용하려는 태도를 예상했던 건 내 기대가 너무 비현실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나의 착오였다.
 
나에겐 부모님과 풀지 못한 숙제들이 있다. 한 번도 정확하게 말한 적 없는, 그러나 인생에서 계속 곱씹게 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짚지 않아도 됐던 건, 부모님에게 별로 간섭받지 않고 자랐고, 간섭을 귓등으로 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고려 중이라 밝혔을 때에도 직장 잘 다니고 있는데 학교를 왜 가려고 하냐, 석사 졸업장 따도 취직 안 될 수 있다, 며 부모님은 만류했었다. 당시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내 대학원 입시 시험일을 우리 부모님보다 더 잘 아시고 챙겨 주시는 기분은 묘했지만, 어쨌든 난 알아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했고, 취직하고, 연애하며 내 삶을 꾸려갔다. 대학원 막 학기 때는 논문 작성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자 부모님께 용돈도 받았다. 사실 부모가 무슨 상관인가. 난 다 컸는데. 심지어 너무 내버려두고 키워서 자율성과 주도성 가득한 인간으로 자랐는데. 내가 부모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 또한 자식인 나에게 마찬가지라는 게 나의 신념인데, 결혼 어쩌고 훈수를 두시니 정말 참을 수 없게 느껴졌다. C를 포함한 주변에서는 나 보고 부모님을 잘 설득하라는데, 부모를 왜 설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과 좋은 관계를 오래 이어가기를 마음먹은 것과 우리 부모님이 그 사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다같이 살자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왜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들이 버거울 때가 있다. C는 드디어 만난 둘이 뭔가를 해 볼 만한 사람이다. C를 대하는 데에 내 부모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만남을 주선한 건 부모에 대한 나의 호의였는데, 좌절의 경험을 하니 더 이상 설득이니 뭐니를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부모와의 숙제를 풀지 못한 점만 새까맣게 부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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