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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20830 mardi 본문
목요일에 면접이 잡혔다. 지난번 탈락의 쓰라림이 아직 남아있는 지금 꽁무니 빠지게 면접을 준비해야겠지만, 또 구인란을 뒤졌고, 이번 면접에 합격하고도 병행할 수 있는 파트타임 일을 찾아냈고, 지원서를 쓰다가 이리로 왔다.
얼마 전에 교육을 들었다. 교육을 통하여 감개무량하게도 범죄피해평가를 할 수 있는 전문가 자격이 주어졌다. PAI와 관련 깊은 회사에 다녔던 것과 청소년상담사 2급(레알 효자 자격증) 덕택에 그 자격을 부여받은 것 같다. 내가 갈 지역은 강원도이고, 범죄피해평가 전문가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어 일을 하려면 (아직은 없는) 기존 직장에 휴가를 내거나 업무가 없더라도 종일 일정을 비워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으면서 이미 범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신을 상상하며 의기양양했다.
그 교육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교육은 서울에서 이뤄졌고, 내 주거지도 서울인데, 그분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분은 내가 일반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사람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진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그 사람을 대했고, 그게 어쩔 때는 불편했으나 대부분은 편했다. 교육이 끝난 주말에 보상이라도 받는 듯 오랫동안 심즈를 했다. 게임을 하루에 8시간이나 했다(지금도 내가 활기찬 연두색 상태가 된 것 같고 그 상태가 될 때 나오는 음악이 들린다). 그리고 다시 보상을 하듯 급하게 지원서를 써서 내고, 구인란을 8시간 동안 탈탈 뒤지기 시작했다(지겨운 모 아니면 도 인생). 상담사의 구인은 보통 학회 게시판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면서 대학원을 막 졸업했던 2년도 더 전에 내가 느꼈던 울분, '서울로 학교는 왔는데 상담 수련을 계속 받고 싶은 사람은 생계가 어떻게 되든 말든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을 하라는 거야, 뭐야?'가 반복되는 게 느껴졌다. 그때 상담을 하고 싶어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는데, 대부분 서류 광탈이었다. 유급 상담은 해 본 적 없으니 실제로 이력서에 쓸 내용이 없기도 했다. 상담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회사에 입사를 결정하고 나서 그중 몇 군데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채용이 취소되었거나 미뤄졌다는 것을 알려왔지만, 이미 무급 수련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에 안도하고 있었기에 날 뽑아 준 회사에 다니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첫 단추를 안 꿰고 도망갔다 온 나는 다시 또 첫 단추 앞에 선 것이다.
대학원생 때 이런저런 곳에서 일을 했다. 주간에 일하고 야간에 학교 가는 삶은 고단했다. 일을 하지 않는 동기들이 학비를 어떻게 감당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나도 본가가 서울이라면 집세 안 내도 되니까 경제 활동 없이 학업 하는 게 가능했을까 싶기도 했고, 학교도 학굔데 그 외에 대가를 더 지불하고 유급 수련이나 슈퍼비전을 받는 것을 보면서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많이 알게 된 서울 사람들에 대한 미묘한 냉정함 같은 것도 느꼈다. 인생의 대부분을 경상도에서 살았고, 그 뒤에 충청도에서도 살았는데, 서울은 모든 이방인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사는 곳이다. 원래도 억양이 세지 않았던 나는 서울 말씨를 빨리 체득하였지만, 간질간질하고 부드러운 어투가 속으로는 웃겼다. 연기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잘해주는 이들에게 고마우면서도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말씨 뒤에 뭐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향인 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놓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고향에 가면 뭔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적한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게 낯설기까지 했다. 고향까지 안 가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교외에만 나가도 그랬다. 세어보니 어느덧 5년차 서울시민이 된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서울과 서울 외 지역의 차이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 사람인 내가 너무 자연스럽고,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어떠한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게 나에게 없다는 것도 안다. 교육과정 중에 만났던 그분에게 내가 익명성 짙은, 조금 냉정하게 보일지도 모를 '서울 사람 1'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지원서를 쓰면서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 정독반을 쓴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집단 얼차려를 시킨 적이 있다. 내가 경험한 최초이자 마지막 학교 폭력이었다. 그들이 한 말 중엔 "너희도 고 3이 되면 후배들에게 똑같이 할 거다."가 있었다. 기도 안 찼고, 나는 당연히 후배들에게 기합을 주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일을 누구에게 말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가다가 똥 밟은 일과 동격이라 느꼈다. 그들에게 인사 똑바로 하라는 강요도 받았다. 누군지 자기소개부터 하던가. 섞이면 구별하기 힘들 만큼 볼품없던 그들은 '아, 역시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구나.'를 강화해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확신에 차서 너희도 이렇게 될 거라던 그들의 말은 종종 생각나기도 했는데, 향기로운 사람 곁에 있으면 주위 사람이 그 향기를 맡지만, 나쁜 것도 많이 대물림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상경해서 느꼈던 차가운 기류는 그것을 느끼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새 그런 방식을 택하고 이용해서 마치 과거의 나 같은 사람에게 싸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니, 이것도 일종의 대물림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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