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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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11202 mercredi: H가 된 H

도르_도르 2021. 12. 2. 17:12

그와 나는 대학원 면접 때 같은 조였다. 그는 내가 떨어질 줄 알았고, 나는 그가 떨어질 줄 알았다. 한창 바쁘게 교류해야 할 첫 학기에 그는 무슨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학교 행사에서 모습을 감췄고, 수업 시간에 멀찍이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곤 '용케도 붙었네.' 생각했다. 조교였던 나는 동기들의 학생증이 나왔을 때 학과 사무실로 가지러 오라는 공지를 했는데, 그때 그가 나보다 1년하고도 하루 일찍 태어났다는 걸 알았다.

그와 본격적으로 대화를 한 건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그는 내담자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에 언제부터 상담할 수 있냐고 물었다. 요즘 상담 필요한 사람들 너무 많아, 너한테 상담 받을 만한 사람 생각났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짜 소개를 해 준 사람은 없었고 나도 자신이 없어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다음 날 정말로 그 사람의 연락처를 줬다. 그 사람은 영원토록 기억될 나의 첫 내담자가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애인과 헤어지고 친구의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담을 하려는 나한테만 유독 내담자가 붙질 않아서 센터장님이 내 생각만 하면 마음에 돌덩이가 앉은 것 같다고 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여름 방학을 마치고 개강한 수업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휴학을 한 번 하여 나와 학기가 다른 데다가 사전에 짠 것도 아니었는데, 같은 수업을 듣게 되어 서로 신기하고 반가워했다. 그도 나와 연애 기간이 비슷했던 애인과 그 사이에 이별했다고 했다. 첫 수업은 일찍 끝났고, 그는 밥 먹었냐며 근사한 가게로 나를 인도했다. 학교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나 싶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말하자 자기도 그 근처에 자주 간다며 언제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당연히 인사치레인 줄 알았다.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추석 연휴, 나름대로 논문과 씨름하면서 지저분하고 게으르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안 보이니 안 그래도 쓰기 싫은 논문이 더 꼴 보기 싫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문 연 안경점을 겨우 찾아 사장님께 문 열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하고 안경이 완성되기 기다리던 중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랑 있는데 나올 수 있냐고. 나는 아무도 만나서는 안 될 꼴이었지만 벌써 마음이 너무 들떠 알겠다고 대답했고, 정말 빠르게 위생과 미적 감각을 다 잡은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급하게 버스를 타다가 그만 계단에서 넘어지고야 말았다. 무릎에 피가 철철 났다. 제발 정신 차리라는 하늘의 뜻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는 "예쁜 다리 다쳐서 어떻게 하냐."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와 그의 친구와 와인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다. H는 김광석을, 그의 친구는 박효신을, 나는 엄정화를 좋아했다.

그 뒤로 H는 항상 날 어딘가로 데려갔다. 앉으면 내 몫의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나눠주었다. 그런 역할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거슬리지 않게 하여 상대가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와 학식을 먹고, 그의 빈 근무처에 가서 함께 공부하고, 공부하고 술 마시면 다 휘발되는 거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도 하자는 대로 따랐다. 심지어 그의 개인적인 약속에도 따라갔다. "내가 가도 되는 데야?"라고 물으면 그냥 편안하게 밥 얻어먹는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의 지인들은 학교 친구라는 나에게 약간의 의구심은 표했지만 부담스럽게 굴지 않았고 적당히 따뜻하면서 쿨했다. 나도 그를 학교 사람들 틈 사이에 끼우려고 노력했다. 그즈음 학교에서 알게 된 이와 비밀리에 사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H를 정말 싫어하여 그를 데리고 다니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래도 H는 H대로 잘 지내도록, 비밀 연애는 안전 이별을 맞도록 최선을 다한 결과 모든 게 무탈했다. 그 짧고 이상한 연애가 끝나자 문득 H에게 관심이 생겼다. H가 질투의 대상이 된 것 자체를 이해 못 했는데 뒤늦게 그가 멋있고, 재미있고, 귀여웠다. 자꾸 만나고 싶었다. 나에게 자주 도움을 청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한 보답으로 돌려주니까 이 관계가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단꿈을 품었다.

그와 같이 다니면 주변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심심찮게 했다. H와 단둘이 혹은 그의 친구들과 아니면 나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H가 어디 가서 나를 안다고나 할까?' 싶을 정도로 H는 건조하고, 의뭉스럽고, 좀 과묵했다. 나도 그런 사람 붙잡고 조잘대고 아양 떠는 건 못 하는 성격인데다가 H에 대한 감정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느라 맨 정신에는 아무리 같이 있어도 뭐가 하나도 안 됐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면 처음엔 재미있다가 나중에는 필름이 끊겼다. H는 나를 너무 좋은 술친구로 여겼고, 나는 벅찼지만 그런 여김을 계속 받고 싶었던 악순환이었다. H는 어떤 영역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해서 웃음이 났지만, 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았다. 나는 H가 벽을 친다고 느꼈고, 그건 이전의 나도 잘하던 행동이라 빤했다. H는 아무렇지 않게 "오늘 시간 돼?"라고 물으며 무언가를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H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제안하지 못했다, 정말 아무것도. 술 자주 마시지, 담배 피우지, 사람들과 만나는 걸 너무 좋아하고 외로움도 큰 그가 내가 원하는 남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주춤거리기만 했다.

H와 나를 이어주려던 친구는 전기게임을 제안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누가 찌릿찌릿 전기를 보냈는지 알아내는 게임이었다. 당연히 내 옆은 H였고, H 옆에 게임 제안자인 나의 친구가 있었다. 그와 손 잡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손깍지가 낯설었다. 손깍지가 손 잡기의 기본값인 사람도 있구나. 다들 집에 돌아간 뒤 친구에게 손깍지 이상하지 않았냐고 물으니까 그 친구는 영문을 몰랐다. H는 나한테는 손깍지를 끼고, 그 친구 손은 그냥 잡았던 것이다! 그의 행동은 2020년의 첫 논란거리로 선정되어 무수히 많은 담론을 낳았다. 중국과 인연이 있는 H는 코로나 사태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예견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날 메신저로 속상한 이야기를 살짝 했는데 그 말은 스킵하고 또 무언갈 도와달라는 그를 보며, 코로나를 핑계 삼아 더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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