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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11130 mardi

도르_도르 2021. 12. 1. 11:11

11월의 마지막 날, H를 만났다. 전날 몸이 안 좋아서 조퇴를 하고 훠궈를 잔뜩 먹은 나는 팅팅 부은 얼굴과 여전히 별로인 컨디션과 품이 너무 커서 덩치를 곱절로 만드는 애인의 패딩과 추운 날씨를 들먹이며 날을 잡아도 이렇게 잘못 잡을 수가 있나 싶었다. 다른 날 보자고 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구 남친이 아니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잖아? 친구 보는데 멋 부려봤자 뭐해? 그러나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꼬리를 길게 빼고 있었다. 화장도 너무 오래 안 했는지 거울을 보니 옛날 얼짱 스타일이었다. 진이 빠진 나는 다시금 '잘 보여서 뭐해!'를 속으로 외치며 회사를 빠져나갔다.

처음엔 분명 쭈뼛거렸는데 안 그런 척하는 모습. 술 잔, 물 잔, 그릇이 비면 무조건 다 채워 주는 것. 흥미 있을 때만 가끔 푸는 팔짱과 다가오는 얼굴. 파혼한 이야기. 집단상담에서의 별명이 '빈틈'이었다는 것("빈틈 님~"). 그런 자극들이 소주와 섞이면서 재단당하는 게 분명한데도 나쁜 점수를 받을 만한 이야기들을 쉽게 꺼냈다. 선을 봤다고 하니까 애인은 그 사실을 알았냐고 물었다. 몰랐지만 알았어도 별 수 없었을 걸. 세상에 정말 맞는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 그 앞에서 무엇을 주깨든 누구도 배신한 느낌이 아니었다. 홀가분했다.

늘 그랬다. 조금만 허술해져도 정신줄을 놓을 거 같아서 아주 반듯한 자세로, 생각을 먼저 하고 말하는 건 가능하지가 않아서 일단은 내뱉음과 동시에 듣고 생각하면서 '이 정도면 정신 나간 건 아니다'라고 마음을 부여 잡았다. 그러면서 속 이야기들이 여럿 오갔고, 그와 너무 친밀해졌고, 정신줄을 놓을까봐 다시 아찔해지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는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나를 걱정하며 시계를 여러 번 봤고, 내 귀가 시간을 챙겼다. 정말로 알맞은 시각에 그와 헤어졌다. 그런 것도 늘 아쉬움이어서 다음에 또 보고 싶다는 생각 속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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