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밍 노트북을 산 뒤 심즈에 미쳐 근무 시간 외 모든 일상이 심즈로 귀결되었다. 그에게서 오는 연락도 못 받기 일쑤다. 할 일은 더 늘었다. 새해가 되면서 업무 강도가 높아진 데다가 4월에 임상심리사 2급 실기 시험을 쳐야 하고, 6월에는 이사도 가야 한다. 운전면허도 1종으로 다시 따야 한다. 할 일들을 전혀 하지 못하고 회사와 심즈에만 시간을 쓰는 나는 출처 불분명한 짜증과 고성과 심술이 늘었다. 부지런한 벌꿀로 거듭난 찬은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내 팔을 붙잡았다. 아이를 잘 훈육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이의 양팔을 붙잡고 못 움직이게 한 다음에 요구하는 바를 말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찬이 딱 그랬다. 날 앉힌 다음 양팔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벗어나려고 아우성을 쳤는데도 오늘은 안 봐줄 거라면서 더 강하게 붙잡았다. 요즘 왜 이렇게 심술을 부리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유를 들은 그는 내가 공부 등 할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2월 1일부터 심즈를 하루에 30분 이상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뿌리치려고 애썼지만, 1/13 하는 회사에 계속 다니고 싶냐면서 나를 윽박질렀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웃기기도 했으나 이내 우울해졌다. 그는 도움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지만 도움이든 피해든 뭘 주든 간에 나는 그가 선을 넘었다고 느꼈다. 그와 함께 같은 집으로 이사 갈지도 몰라서 우리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같이 살면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이며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데, 기분이 안 좋았다. 나는 그냥 혼자 지내야 하는 사람 아닐까, 내가 타인에게 곁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인가, 끝내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나를 달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씻고 나와서 한 번, 밥 먹다가 한 번, 닭 주스를 만들다가 한 번씩 와서 내 기분이 어떤지 확인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지 나름 고안한 방안을 제시했다. 간섭받는 것 같아서 싫으면 앞으로 안 그러겠다,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잘하겠지, 그런 말들을 했다. 난 잘하고 싶지 않다! 잘하긴 뭘 잘해. 그저 마음대로 살고 싶다. 게임하고 싶을 때는 게임하고, 공부하고 싶을 땐 공부하고, 열심히 하고 싶을 땐 열심히 살고,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땐 그냥 게으를 거다. 지금은 그와 매일 얼굴 보고 계속 붙어 있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을 때가 온다면 언제든 떠날 거다. 난 아무것도 위할 필요도, 이룰 필요도 없다. 이런 마음으로 그와 주거를 공유해도 될지 머리 아프다. 그와 평생 좋은 관계로 잘 지내야 한다는 책임감은 짐처럼 느껴질 것 같다. 부담은 싫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하고 싶은 걸 못 참기 때문에 그보다 더 원하는 게 생기면 그를 떠날 것이다. 지금이야 그러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상처의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살아가나. 아무것도 못한다. 그냥 눈 딱 감아야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를 부적처럼 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