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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01121 samedi

도르_도르 2020. 11. 23. 17:29

가민 시계는 17,124보를 걸었다고 측정했다. 아이돌 저리 가라 할 만큼 빠듯한 일정이었다.

 

 

우선 숙취를 이기고 일어나 집을 치워야 했다(벌써 최고 난이도). 가족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게 반갑기도 했지만, 최근에 엄마와 심하게 다투고 나서는 다음에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서 손님맞이 준비 중 첫 단계인 집 청소에 도달이 늦었다. 급한 대로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전날 (지인에서)친구(먹은 이)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르 남자 친구 잘생겼잖아!" 아니라고 방어했는데, SNS를 맞팔로우 하는 B가 사진을 봤다고 했다. 몇 안 되는 나의 팔로워 중 몸짱이 한 명 있어서 계정을 확인했으며, 필시 그 사람이 도르의 남자 친구라는 것이었다. 찬은 단연 그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친구들은 또한 조르바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넷이서 신년회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가는 술잔 속에 부르고 싶은 사람은 더 늘어 B의 남편과 찬과 조르바, 그리고 M이 우리 집에 다 모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상상을 했다. 벌써 마음이 푸근했다.

양치만 하고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터미널에 달려가 부모님을 맞이하였다. 엄마는 찬에게 선물 받은 코트 색깔이 예쁘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돌아가는 버스도 금방 와서 편하게 앉아서 집까지 갔다. 날이 따뜻했다. 아빠는 내 침대에 누워 역사 유튜브를 보시고, 엄마는 냉장고 청소에 한창이셨다. 나는 그제야 머리를 감고 단장을 했다. 하지만 곧 현이 터미널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그를 마중해야 했다. 시간 맞춰 다시 부모님을 모시고 지하철 타고 터미널에 가서 현이까지 데리고 넷이 선릉역으로 향했다. 아빠의 친구 가족을 만나러. 

 

아빠는 청도 출신인데, 그곳에서 박효수 선생님에게 글 공부를 배웠다. 그때 같이 공부를 했던 동생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이번 약속을 잡게 된 것이다. 선생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서로 본 적이 없으니 두 분은 20년도 더 넘어서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 나온 장성한 아빠 친구 분의 아들이 선생님 장례식 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들으니 세월이 실감 났다. 아빠가 고향에서 서당에 다녔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자를 잘 아실 뿐만 아니라, 외국어, 주역, 사주 등 다방면으로 공부하기를 즐기는 아빠의 모습에 옛 스승의 영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박효수 선생님은 정말 큰 인물이었고, 대단하신 분이었단다. 박효수 선생님의 일화를 들을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중에서 "많이 배우려고 하지 말고, 배운 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성함 그대로(효도 효+빼어날 수) 이름난 효자였다고 했는데, 책 말고 현 사회에서 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무엇보다 아빠 친구 분의 직업이 우리 가족 최대의 관심사였다. 우리 아빠는 대학을 나와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얻었기에 어렸을 때 배운 글 공부는 취미에 그치게 되었지만, 아빠의 친구 분은 십대 때부터 사주 공부에 골몰하였다. 그러니까 그분은 (내 주변 한정)모든 이가 관심 있어하는 사주 전문가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관상, 풍수지리 등 관련 분야까지 섭렵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사주나 점을 잘 보지 않는다. '심리학은 과학이다'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심리학도가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사주를 믿기 힘들 거라 생각한다. 사주를 봐주는 사람이 나보다 내 인생에 대해 더 아는 것처럼 말하는 데에서 느껴지는 찝찝함도 불편하고. 그래서 아빠 친구 분이 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자체에 조금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사주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라고 생각하셨다.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남편 복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잘못된 거라고. 사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설명도 해주고 대안도 제시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말은 이미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마인드는 상담사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듯 마음이 누그러진 것은 잠시...

처음에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근황 이야기를 하느라 뭘 봐주고 이런 건 않기로 했는데, 어쩌다가 그 분이 내 관상이랑 사주를 봐주시게 됐다. 내 상에 대해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잔머리가 안 보여서 신뢰가 간다."였다. 오. N이 나에게 "수가 안 보인다."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그 말과 일치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나는 가진 걸 다 보이는 게 왠지 수치심이 들어 표현을 잘 못하는데, 그게 의뭉스럽다, 소심하다 같은 부정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신뢰로 이어지니 신선했다. 그리고 내가 부자인 중년 여자들이 좋아할 관상이라면서 아주 부잣집에 시집갈 수 있다고 했다(급발진). 엄마가 손뼉을 쳤다. 내 사주를 보시더니 보기와 다르게 고집이 세고, 간섭받는 걸 싫어하고, 의심이 많고, 까칠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남자가 나 좋다고 하면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라고 생각하며, 내가 남자를 못 만난다면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서이기 때문'이란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타고났다고 했다. 그래서 결론은? 맞선 제안이었다. 나를 소개해 줄 곳이 있는 것 같았다. 애인이 있고 결혼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세상은 왜 자꾸 결혼할 남자를 지금 소개해준다는 걸까?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지러웠다. 

 

아빠 친구 가족 분들과 헤어지고, 아직 배가 안 부르다는 현이의 말에 따라 쌀국수를 한 그릇 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욕실이 하나이니 차례로 씻는 것도 일이었다. 겨우 이부자리를 깔았다. 침대를 아빠에게 내어주고 방바닥에 누워 상담사 마인드인 사주 전문가가 내게 했던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너무 자신감이 없어 보여서 기를 살려주려고 그런 것 같다, 는 결론을 내렸다. 찬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뛰쳐나가지 못해서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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