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학 시절 친했던 D에게 3년 만에 연락이 왔다. 오늘은 선배 Y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빗물에 옷 젖는 게 싫어 약간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실 때문에 그는 단단히 화가 나버렸다.
그를 가장 못 견디게 한 건 바로 D이다. '반갑지 않은 인물'이라고 표현하였다.
D는 차도 있고 집도 있어서 내가 대전으로 갈까 싶었다. 그는 그 말만으로 성별이 다른 사람 집에서 자는 건 상식이 아니라고 했다. D를 모르는 자신에겐 길 가다 내게 번호를 묻는 사람이나 D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며, 불안하고 걱정된댔다.
나는 어린 애가 아니고, 심지어 나이도 너보다 더 많고, 어떤 사람이 안전한지는 내 나름의 기준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네가 싫으면 자고 오지 않겠다, 고 말한 후에도 공방은 계속되었다.
자신이 남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무 간섭도 할 수 없는 거냐고.
남이 아닌 연인이니까 직접 못 봤더라도 연인의 친구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거 아닌가. 연인의 이성 친구는 전부 연적이 되나.
그의 핵심 주장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음주 후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두 번째, 너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봤잖아.
취하면 어떤지 아는 사람과 연인이 되는 일이 피곤할 거란 생각은 못했냐, 따위의 말로 그의 신경을 긁고 싶진 않았다.
그는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D와 함께였던 대학생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밤늦게까지 D를 비롯한 남자들과 술 마시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그 사람들 머릿속의 똥까지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게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가까웠던 그 사람의 생각이라는 걸 안다.
그가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건 아니다. 내게 관심과 애정이 많아서 그의 눈에서 황이 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모든 관계를 남자와 여자의 만남으로 단정 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폭력적인 모습이 된다.
모든 인간은 성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말도 안 되지만)이성인 친구가 키 크고 다정하고 재미있고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무거운 짐도 척척 들어 준다 쳐. 호감이다, 남자답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게 서로 합의된 특정 행동까지 가려면 술 취해서 둘만 어떤 공간에 남겨지는 걸로 충분할까?
연인으로 선택하는 이가 그럴 만해서이듯이 친구로 남는 관계도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친구가 여자 관계 복잡한 사람일 수도 있고, 코나 손톱 모양처럼 사소한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호감으로 가득해서 시작한 연인 관계도 위기를 극복 못하면 헤어지고 마는데, 마음에 드는 몇몇과 마음에 들지 않는 몇몇을 가진 그냥 친구와 연인이 되려면 뭘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남들이라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누가 아무리 말려도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한다. 오히려 하지 말라고 소릴 들으면 원하는 게 뭔지 더 분명해진다.
이어질 인연은 언젠가 그렇게 되는 거지, 내가 신경 쓰고 말린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여기-지금에서 오롯이 내 감정에 충실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드라마보다 현실에서 행복한 부부가 많듯이 모든 이성 친구들이 취한다고 스킨십을 원하진 않는다, 자신감을 가져라, 연인을 자주 의심하는 사람이 이성에게 끌리는 경험이 더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런 말들을 경황없이 나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