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찬과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무거운 짐수레를 끄는 느낌이었다. 수레는 가끔 움직였다. 나는 그를 보았다. 모자에 가린 얼굴 윤곽만 비칠 뿐이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음식이나 컵을 봤다. 더 이상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앞에 있으면 쳐다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냐는 생각도 그만뒀다.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았을까? 미움이나 원망은 이미 지나갔다. 종종 그를 필요로 하지만 요구가 전부 충족되냐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원하는 게 없다(뿌옇게 바라는 건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한데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슬픈 사건을 더해서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기...?). 잦은 부딪힘 속에서 당위성을 먼저 버렸다. 어떤 게 사랑하는 것이고 어떤 게 헤어질 만한 것인지, 어떤 게 연인을 대하는 태도이고 어떤 게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까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지 하는 것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관계를 성실하게 이어가려는 노력을 놓은 결과, 어중간하고 미적지근하고 건조한 상태에 들어서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이러한 상황에 불만이 별로 없다. 무엇이든 투쟁해서 쟁취해야 하던 나에게 힘 다 빼고도 이어지는 이 관계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것도 무척 편안한 경험. 이전에 들였던 뼈 빠지는 노력 대비 아웃풋은 미미했는데, 지금은 인풋과 아웃풋이 조화롭다. 언젠가 취해서 '모르는 척하는 거 웃기네.'라고 그에게 보낸 적 있다. 찬도 알아차린 것, 기억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힘을 빼는 건 힘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라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제법 잘 가고 있다. 오늘 데이트 즐거웠다고 서로 소회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