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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서 있는 여자_박완서 본문
230111 mecredi
『서 있는 여자』_박완서
완독은 1월 7일에 했다. 대망의 2023년 첫 책! 횟수로는 세 번째 독서모임이었다. 언급하지 않은 두 번째 모임 때 『인간의 조건』 일부 읽기를 시도하고 대화 나눴으나 상호 합의하에 결국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박완서는 영원히 좋아할 작가 중 한 명이다. 『서 있는 여자』 또한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기에 이번 기회에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좋아하는 작품을 아끼는 사람들과 나누는 기쁨은 정말 크니까. 요즘 워낙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많다 보니 어떤 책은 억지로 끌고 가면서 읽기도 하는데, 이 책은 책장 넘어가는지 모른다는 바로 그 소설 읽는 재미를 충분히 만끽하게 해 주었다. 주옥같은 찰진 대사들에서 쫀득쫀득 찰지고 영양가 높은 솥밥이 생각났다. 예스럽고 뜻 모르는 단어들이 보여 검색을 생활화하였는데, 독서모임 날까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뭔지 몰랐다는 건 아이러니이지만.
(아니, 그런데 부처님 가운데 토막 그거 아닌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095
[속담으로 보는 불교 가르침] <23> 부처님 가운데 토막 - 불교신문
“부처님 가운데 토막.” 마음이 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드물긴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난다. 공자가 말하는 그야말로 생이지지한
www.ibulgyo.com
요즘 내가 고유명사에 유독 약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등장인물에 대해 살짝씩 메모하면서 읽어나갔다.
-하연지: 주인공. 교양지 기자. 평등한 부부 생활을 위해 자기보다 형편이 훨씬 못한 철민과 결혼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와 정반대인 본인의 결혼을 이어나가기 어려워 한다.
-경숙: 연지의 어머니. 주부. 자기 정체감이 하석태의 아내인 것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이혼을 앞두고 아찔해하는 인물. 하석태의 아내라는 게 그렇게 좋은 자기상이었을까?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순탄치 않을 때도 있었을 텐데, 그것들을 다 억압한 것 같다. 이혼한 친구들을 방문하고 와서 더욱 딸의 결혼의 지속을 강요하게 된다.
-하석태: 연지의 아버지. 교수. 일각에서 연지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딸의 이혼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지가 그래도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철민: 연지의 남편. 부부강간, 가정폭력(아내구타), 협박, 상습적인 약속 파기 등 읽기 힘들 정도로 나쁜 일들을 저지른다. 자기가 남자이고 연지가 여자라는 이유로 뻔뻔하게 군다.
-박순님(닥터 박): 경숙의 이혼한 친구. 의문의 대프리카 인증(?)
-은선: 경숙의 이혼한 친구 2. 대전에 거주. 심한 결벽증 이면에 구 과장과 밀회를 즐긴다.
-현순주 여사: 연지가 취재했던 여성운동가. 연지를 환멸 느끼게 한다.
-미스 고: 연지와 함께 근무하는 후배 동료. 사내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해 왔던 역할을 하여 연지를 불편하게 만든다.
성 의식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주제이다. 내가 어떤 일로부터 살아남았는지 한시도 잊은 적 없다. 키가 다 컸다고 상황이 유리하게 바뀌었을까? 천만에. 가까운 여자들부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린 나는 말이 많았다. 그보다 더 어릴 땐 자주 울었고 예민했다. 내 초기 기억 중 하나는 “여자 애가 말이 너무 많다.”라고 들은 것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그 피드백을 쉽게 수용하였고, 이제 나는 그 어떤 자리에서도 말 많은 사람이 아니다. 여자들은 주로 그런 식이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다, 결혼만 잘하면 된다, 예쁘면 된다, 어차피 결혼하면 집안일 많이 할 건데 지금은 하지 마, 맏딸은 세간 밑천이다, 너는 예쁘니까 좋은 남자가 데리고 갈 거야, 여자니까 네가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동생도 돌보고 해, 이런 거. 명백히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면서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어떻게 하려는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다. 성적 흥분이나 연애 감정을 경험하기 전부터, 관계가 멀고 가깝고에 상관없이. 다른 여자들은 그럼 남자로부터 안전했나? 철민은 연지를 때릴 수 있었지만, 연지는 못 그랬다.
나는 남자가 쉽고 우스웠다. 일부 학습한 것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포장하고 원하는 걸 얻고자 했다. 그럼에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믿음은 포기할 수 없어 미덕을 펼칠 수 있는 남자를 찾아다녔다. 안전하게 나를 보여 주고, 애정을 주고받고, 평등하길 바랐다. 지금도 실은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환상이 있다. 나 또한 연지와 비슷하게 굴 때가 있었는데, 한 남성과의 결혼을 꿈꿀 때였다. 평등한 결혼 생활을 여러 번 언급하며 그를 회유했다. 무슨 책을 읽게도 하고, 강연도 같이 들으러 가고, 내가 원하는 결혼 생활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결혼과는 다르다는 걸 그에게 주지 시켰다. 그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지만, 결국 그가 원한 건 가정에 충실한 전통적인 여성이었다. 본인의 인생 흐름 중 결혼이라는 과정을 그렇게 중시하면서 상대의 인생 여정은 존중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여태 헛물켰다는 걸 느꼈다. 그는 사실 남들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철민처럼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유난이다 싶었다. 하지만 빤히 보이는 문제의 도가니탕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몸을 던질 수가 없어서 그가 나만큼 문제를 문제라고 봐주길 바랐다. 그러나 매 데이트마다 다른 원피스에, 쿠키까지 구워 가는데, 평등을 외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와닿았으려나. 어디에나 철민은 있다. 모든 전 연인들, 프렌즈의 로스, 직장 상사, ...
'과거는 일종의 외국'이라는 말이 있다. 2023년이라는 외국에서 1970~80년대를 살았던 연지를 보며 그가 좀 더 편하길 바랐다. 철민이 해 주는 밥이며 집안일이며 철저하게 누리고, 회사에서도 철민의 전화를 떽떽거리며 받았으면 싶었다. 철민의 친구들이 놀러 와도 철민 스스로 대접하게 연지는 어디 다방에라도 혼자 가던지 하고, 하석태에게도 아무 말 못 할 때까지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임신 중지는 무덤까지 갖고 가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 같으면 폭력은 가족 간에 일어난 일이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데,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 인식 개선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마 경숙의 친구인 순님과 은선은 정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많았겠지. 사회경제적인 지위로 선입견과 모멸감을 절대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석태, 철민, 연지의 차장 같은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미스 고 같은 여성이 득실대는 한 그들이 어떻게 바뀌냐고. 나도 분명 미스 고보다는 연지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우린 평등해야 해!"를 외치다가는 예전처럼 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결혼 생활에서 어떤 걸 바라는지, 어떠한 배우자를 만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누게 되었다. 결혼은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일이다. 내가 만약 혼자라면 미래에 우리 부모님 두 분을 돌보면 되는데, 결혼을 한다면 나와 배우자가 그 짐을 나눌 수도 있지만 나 혼자 배우자의 부모님까지 총 네 명을 돌보아야 할 수도 있다. 내가 힘들게 번 돈을 상대방이 다 까먹을 수도 있다.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싶으나 이런 식으로 우리 부모님도 만났고 부모님의 부모님도 만나서 가정을 꾸리셨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셨다고 했다. 배우자는 우리 부모님의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함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상대에게 그렇게 크고 어렵고 고마운 일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생각해 온 이상적인 배우자의 모습 중 이상하게도 떠오른 건 상처였다. 나는 상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것을 서로 알아차리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해하고 다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싶은 사람. 서로의 행로와 성장을 궁금해하는 사람. 아, 역시 너무 이상적인가?
4%
박완서는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성미’로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7%
그때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아직도 경숙 여사의 내부에서 타다 만 장작처럼 매운내를 풍기며 잠재해 있었다.
9%
그러나 그런 뜻을 세상에 공표하고 나면 이미 그건 세상사일 뿐 당사자의 것은 아니었다.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이 더덕더덕 누더기를 걸치든, 빵처럼 부풀어 오르든 당사자는 속수무책이었다.
9%
어쩌면 연지가 바라보는 것은 결혼이란 것의 허울인지 몰랐다. 결혼은 이제 작은 들창의 아름다운 등불이 아니라 KS마크를 꿈꾸며 날조되는 제품, 아니 부도를 꿈꾸며 남발되는 어음이었다.
10%
(...) 약혼식을 하고 나면 약혼녀가 되기 때문에 여태껏 즐겨 입던 진바지에 면티 차림으로 문밖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생각.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싶기도 하다.
10%
그러나 경숙 여사의 억지와 편견과 만나면 자기 생각을 펴보기도 전에 미리 지쳐 떨어지는 게 요즈음의 그녀였다.
> 나보다 나이 많은 여성과, 그중에서도 가족과 결혼이나 성 관념에 대해 말할 때 느꼈던 마음.
12%
“(...) 그래서 서로서로 번갈아가면서 벌어서 공부를 시키기로 의논을 한 거예요. (...)”
> 이북엔 메모 잘 안 하는데 나도 모르게 ‘안 돼에에에에에에’라고 썼다.
12%
정말 젊음이란 젊음을 주체해서 아름답게 다스리는 힘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젊음의 온갖 찌꺼기들을 주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막연하면서도 절박한 비애를 느꼈다.
13%
“자장면으로 하든지 호떡으로 하든지는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신경쓸 거 없네.”
> 호떡 드립이라니. 드립마저 찰지다.
14%
작은 균열도 없이 완벽한 포장에 그녀는 스스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15%
기껏해야 케케묵은 식인종 시리즈로 웃음을 강요할 것 같은 더리쩍은 얼굴이었다.
> 책 읽으면서 사전을 자주 찾아봤다. ‘더리쩍다’는 ‘더리다(격에 맞지 아니하여 조금 떨떠름한 느낌이 있다. 싱겁고 어리석다는 뜻.)’에서 온 말이라고 박완서 소설어사전에 나온다.
16%
강바람이 갑자기 냉랭해지면서 저만치 아파트 단지 위로 넘어가려는 해가 강 위로 시뻘건 선혈을 떨구기 시작했다.
> 비유 보소.
18%
“그래서 잠은 남 안 보는 데서 자게 돼 있잖아. 방이 없으면 어둠이라도 있게 마련이야.”
>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이 구절이 복선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19%
“나 자기의 순진성 의심한다.”
> 제발 의심해... 지금 의심해...
20%
“조금도 억울하지 않은 내 마음이 문제란 말야. 남성 우위를 짓밟지 않으면 동등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성 우위를 보호해줬을 때 오히려 편하고, 맞서려면 불편해져, 불편할 뿐 아니라 온통 부자연스러워져, (...)”
21%
그런 공포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용서를 빌자. 당신 없이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하다고 애걸하자.
> PTSD 4F의 마지막 F(fawn) 아닌가, 이 정도면?
34%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어 하는 존재를 드러내놓고 있기처럼 거북하고 쑥스러운 일도 없었다.
> 집에 쳐 들어와 놓고, 미쳤나.
34%
“맨션 아파트쯤이냐. 재색을 겸비한 학사 아내를 부엌데기로 부리는 재미가 더 삼삼할걸.”
> 쫓아내...
37%
연지는 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면서 그런 철부지와 일생을 같이할 일이 참으로 난감하게 여겨졌다. 여태껏 어떤 난관과 부딪쳐도 그렇게까지 난감해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 정말 난감하다, 난감해. 나 혼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48%
비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여자는 비참했다. 경숙은 자신 속엔 아직 비경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싶고 그게 느닷없이 짜릿한 자기애가 되고 있었다.
> 보이는 걸 중시하는 경숙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비경이 화병 만들어요...
89%
바보 같은 짓이란 취소되기보다는 자꾸 되풀이되게 마련인가.
89%
무엇이 잘못됐나를 모르는 잘못은 잘못의 되풀이나 개칠이 있을 뿐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89%
소녀 같다는 소리가 과장인 줄이야 알지만 그 속에 10분의 1만큼의 진의만 섞여 있대도 한 재산 떼어주고 싶도록 젊음에 치사할 나이였다.
> 표현이 너무 좋다. 알기 쉽고 재미있다.
90%
산다는 것이 다만 무력하고 무감동한 그렇고 그런 것만은 아닐 거란 희망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91%
그러나 실상 그녀가 방금 느끼고 있는 거리감은 그런 말로 윤색할 수조차 없는 그냥 거리감이었다. 어머니의 만류와 갈망에도 불구하고, 아니 만류와 갈망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의 삶은 어머니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전하고 있다는 걸 어머니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93%
그녀의 일상의 틀은 절망적으로 견고했다.
96%
여성이 오랜 관습으로 지켜오던 일상의 미덕이나 습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자 할 때, 이런 선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인가? 그저 개인적 삶의 방식에 불과한 것인데,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일 때 사회적인 도덕의 논리로 통제되는 구조는 무엇 때문인가?
98%
연지 스스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삶의 방법”을 공론화하지 못하는 한, 연지의 평등적 부부관계는 요원한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연지와 서술자, 혹은 작가의 판단인 셈이다.
98%
(...) 여권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 세계에서 여성이 희생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여성 스스로 여성의 규범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는 데 거드는 역할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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