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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이선 프롬_이디스 워튼 본문
221214 mercredi
『이선 프롬』_이디스 워튼
완독은 12월 8일에 했다. 『이선 프롬』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던 독서모임 시즌 2의 영예의 첫 책이다. 민음사 유튜브의 파국 로맨스 소설 중 하나로 소개되어 우리 곁으로 왔다. 또 다른 파국 로맨스 『폭풍의 언덕』을 지난 시즌 독서모임 때 함께 읽은 우리는 히스클리프 같은 인물을 만나리라 기대하며 책을 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sYhBLCoEPs&t=1143s
공통된 의견은 이선에게서 히스클리프 급 열정과 광기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이 달랐다. 황량한 배경과 무기력함, 좌절, 공허가 더 많이 나타난 책이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복수만을 향해 달리던 히스클리프와 달리, 이선은 결국 체념했다. 왕짱구는 매티랑 둘이 있을 때와 지나와 둘이 있을 때 이선의 태세 전환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분명 빛나는 위로의 장소였던 부엌이, 다음 날엔 춥고 지저분한 장소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모두 이선에게 어느 정도 화가 나 있었고, 지나의 입장을 이해할 줄 알았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만연체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 책을 다 읽은 직후엔 담백하다 못해 허전했다. 『폭풍의 언덕』과 『이선 프롬』을 비교하자면, 전자가 마라맛이라면 후자는 한약맛.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짧은 분량과 액자식 구성 등 책을 희미하게 만들었던 점이 오히려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적당함 같았다. 황량한 분위기, 지독한 가난이 북돋아 주는 현실성이 형성하는 이 책만의 독특한 분위기도 좋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빨려 들어간 책은 아니고 몰입하기까지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액자식 구성 때문이다. 스탁필드에 파견된 엔지니어인 화자는 이선 프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그와 친분이 생기고, 이선에게 직접 들은 것과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짜 맞추어 독자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책이 전개된다.
이선의 유약한 성격에서 척박한 환경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그의 태도가 아쉬웠다. 사랑을 느끼는 매티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비참하게 살 지나를 걱정하는 그. 하긴 그랬으니까 도시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을 것이다. 매티가 이상과 개인의 지향이고 지나가 현실과 사회의 지향이라면, 살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현실과 엄격한 사회였다.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개인과 사회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선은 가업을 물려받아 (문자 그대로)조상들의 무덤 위에서 조상들이 살았던 집에서 살아가는, 이미 현실과 사회적인 잣대에 굴복한 사람이다. "내가 직접 매티를 데려줄 거야."하고 거듭 말한 것이(p.135) 용하다. 나는 이선에게 제발 매티를 데려다 주라고 외쳤다. 서로 편지하며 그리워하는 사이로 남으라고, 한때의 소중했던 추억으로 간직하라고 울분에 차서 외쳤다. 사랑한다며! 나이도 더 많잖아? 아니면 한순간이라도 모든 걸 잊고 매티에게 집중해서 행복을 느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매티와 썰매를 타러 갔고, 사고 후에도 '말에게 여물을 줘야 할 텐데.'(p.155)라고 생각한다. 이미 과도하게 사회에 순응한 사람인데, 삶이 너무 척박하다 보니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걸게 된 거지. 더 비극적인 건 매티는 이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외롭고 힘들어 서로를 의지하던 두 사람은 이 생을 리셋하고 싶은 마음에 눈이 뒤집어졌다. 가진 게 너무 없어서 함께일 때 느끼는 따뜻함에 모든 걸 걸고 싶어 했던 두 사람. 하지만 이선은 결국 체면과 (그놈의)말을 끝까지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피폐한 삶이 문제였지 매티가 문제인 것이 아니였다.
이선이 큰 용기를 내어 둘이 도망 쳐서 새 가정을 꾸렸다고 할지라도, 매티 또한 시간이 흘러 지나의 모습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선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기 힘든 사람이다. 지나와의 결혼도 상황 탓으로 돌렸으며(장례가 끝난 뒤에 지나가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보고 이선은 농장에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나에게 자기 집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가끔 그는 어머니가 겨울이 아니라 봄에만 돌아가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p.67), 자신이 공부를 더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가족 탓으로 돌린다. 이선은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며, 상황에 의한 선택들에 자기 나름대로 책임을 지지만 후회의 노예로 살아간다. 삶이 좀 나아지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나가 점점 병들어갔던 것도, 후회하는 이선에게서 애정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비슷한 결혼 생활을 이디스 워튼이 경험했다면, 말 못할 정도로 불행했을 것이다. 반전은 지나의 생명력이다. 마지막에 지나의 활약을 보면 꺼져가는 이선의 눈에만 지나가 그렇게 눈꼴시게 보였던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매티였고, 시중 드는 사람이 지나였으니.
그래도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매티를 몰래 지켜 보며, 부잣집 도련님의 플러팅에 당차게 대응하는 매티를 기특해하는 이선과 단둘이 집에서 나눴던 저녁 식사 등 은밀하게 애틋하게 서로를 그리워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은 참 절절하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랑을 부각하는 스탁필드의 춥고 적막한 겨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탁월하게 묘사되었다.
p. 43
이선의 눈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스카프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녀는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신호를 보내기 싫었다. 비록 자기 생명이 그녀의 다음 몸짓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해도 말이다.
> 바조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내가 생각났단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p. 85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에 이선은 두 사람이 어떠한 감정의 격발도 없이 오랜 세월을 함께 나눈 친밀한 사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늘 이렇게 밤을 지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필사도 했으나,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방과 확 가까워진 것 같은 그 느낌을 너무 잘 묘사했다.
p. 110
이 말이 마치 경고의 횃불이 캄캄한 어둠을 통과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계속 울렸다.
> 듣고 싶지 않은 뜻밖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구나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p.173
문학은 도덕과 윤리를 전달하는 것과 다른 그 나름대로의 의무와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시녀가 될 수 없고 사회적 메시지의 도구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에서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소재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하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소재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얼마든지 도덕과 윤리를 심어 줄 수 있다.
> 『나목』을 두고 불륜 커플 운운했던 어떤 님에게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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