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대출이 엎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일단 계약은 성사되었고 큰돈이 필요하기까지는 기한도 있으니, 잘 준비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 갈 집을 구할 때처럼 절망적이진 않다.
어제 사주에 이어서 오늘은 상담을 받고 왔다. 힘든 일 극복에는 최적의 코스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건 진리이지만, 돈을 들이고 머리를 써서 해결의 시간을 끌어당기는 이 방법은 효과가 아주 좋다. 지금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어제는 같은 시간에 눈물을 주체 못했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이다. 어제만 해도 그가 그리웠고, 다시 만날 궁리를 했다. 오늘의 나는 바람 없는 깊은 바다 같다. 어둠이 깔리긴 했지만 물결은 잔잔하다. 그를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면서 가까워지고 싶던 욕망이 사라졌다. 내가 이용당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오랫동안 불투명했던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게 이제야 보인다. 그가 말했던 사랑은 '신뢰'였고 '계산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만지고 싶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접촉에 예민하듯 그도 계산을 많이 하는 사람이겠구나, 까지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뢰를 운운하면서도 정말로 신뢰가 갔던 과거 어떤 사람의 이미지를 그에게 덧입히면서 내 사유는 종료되었다. 상대가 좋아할 포지션을 사수하면서 정말로 그 사람이 믿을 만한지를 응큼하게 판단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많은 순간 이방인이었고, 이미 형성된 무리에 끼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대범하지 않은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늘었겠지. 그는 여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좋았고, 외모로 주목받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아마 자신이 가진 게 뭔지 어릴 적부터 잘 알았을 것이고, 그건 그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 없이도 인생을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질문이 아주 많았다. 평생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질문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냈다. 나랑 안지 며칠 됐다고 연애 여부를 물은 후에 그 전 연애는 어떻게 끝난 건지 이유를 궁금해했다. 내가 조심스럽고 예의를 차리자 싫어했다. 내가 편했으면 좋겠다고 편한 게 제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보여주기 식이 아닌 편안한 상태의 '진짜 나에 대한 정보'였다. 그래야 절대 변하지 않을 자신과 연속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으니까. 똑똑하고 성실하고 착한 나를 닮고 싶다고 떠벌렸지만, 그 뒤에 따라붙는 말은 '그런 도르가 나를 잘 도와주고 내 옆에 있음으로써 나를 빛내주기까지 하니까'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맞지 않는 나의 행동들을 발견하자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언질 했던 접촉부터 앗았다. 사과하길 주저하지 않았지만 언제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미안하게 느꼈을까 싶다. 그는 코로나 때문에 주 수입원이 끊기기도 했고, 종합소득세 신고 같은 건 엄두도 못 냈다. 조건이 되는 재난지원금도 신청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생존하지 못할 뻔한 것이다. 돈을 빌려주고, 세금 신고를 해주고, 지원금을 신청한 건 나였다. 사실 그런 어려운 시기가 없었다면 그는 나와의 관계를 더 빨리 끝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그가 요구했던 도움을 준 나에게 이제와서는 내가 너무 어른처럼 느껴지고 가르치려 든다고 불만이니까.
그가 나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것에 감동하곤 했는데, 공감, 접촉, 헌신 같은 건 물론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 특히 음식에 돈을 많이 썼다. 건강을 위한 영양제도 챙겨주고, 많은 날 배달 음식을 시키고, 음료, 과일, 간식 같은 것들을 잔뜩 사다주었다. 단순한 그에게는 음식이야 말로 최고의 쾌락이었을 것이다. 그걸 같이 먹는, 시켜먹기 좋은 애인도 있으니 금상첨화였겠지. 어쩌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 같다. 가끔 그가 선을 넘을 때마다 드러났던 밑천을 그런 걸로 메꾸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음식은 내가 이만큼 너에게 베푼다는 걸 보여주기에도,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내 마음을 달래주기에도 여러모로 좋은 도구였다. 나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알쓸범잡에 나온 사이코패스를 그가 욕할 때 좀 웃었다. 그에게도 그런 기질이 다분하다고 느껴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범죄자가 될 운명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나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무려 상담사이다. 공감 없는 상담은 있을 수 없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감 능력의 결여이다. 그는 늘 내 기분을 물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확실히 알고 싶다는 이유로 묻고 또 물었다. 자신이 내 기분을 망쳤으면서 내 기분이 '진짜로 나쁜지' 확인한 다음에 사과하는 시늉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이 되었다. 그가 나를 안전하게 수용해준다고 착각했고, 나의 말에 둔감해 보이는 그에게 의사를 알리려면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타인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려던 그 전과는 다른 방향성이었다. 그것은 그의 당당함 속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그는 늘 어깨를 펴고 다녔고, 쥐뿔도 뽐냈다. 자신감이 없는 나와 달리 자신을 검열하지 않는 그는 세상에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저렇게 살면 절대 성공하겠다고 생각 못할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살면서 본인의 성공을 점쳤다. 덕분에 나도 무언가가 눈에 띄게 편해졌다. 주위 사람들이 먼저 눈치챌 정도로.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타인이 정말 그렇게 자신을 보는지 관찰하던 그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신경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말 타인이 의식 안 되는 것처럼 살던 나는, 사실 속을 까보면 닮았을 테다. 묘한 유대감은 그래서 느껴졌나 보다.
상담 선생님은 그를 '귀엽지만 잔머리 굴리는 반려 동물' 같다고 표현하셨다. 아, 정말 머리는 굴리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서 의아했었지. 하지만 알쏭달쏭한 게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더 알고 싶었고, 궁금했고, 오랫동안 옆에서 그를 파헤치고 싶었다. 이제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고 나니 그에 대한 흥미가 살짝 떨어지면서 들뜸이 해소되었다.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슬플지, 그를 그리워할지 공감해주셨다. 하지만 언제라도 헤어졌을 인연과 이별을 맞은 지금을 견뎌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고생 많았다고도 하셨다. 온 세상이 그와의 이별을 축하해주고 있다. 친구의 꿈에 나타난 대통령도, 내 꿈에 나타났던 미남자도 모두 신의 가호 아니었을까. 어제는 그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머니를 안아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