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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10629 mardi

도르_도르 2021. 6. 30. 00:18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어 태블릿을 켰다. 전 애인이 된 찬에게 메신저를 보낸 직후이다. 내뱉을 때 기분 좋은 파찰음이 느껴지는 그의 이름. 종일 그의 성격, 그와의 관계,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가까운 사람들과 분석했다. 그가 투명한데도 속이 다 안 보였던 건 사실 하는 짓만 날것이지 솔직하지 않아서였다. 솔직한 건 대단한 일이다. 일단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걸 의심하지 않아야 하며, 심지어 표현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사라진 유년기를 생각했다. 아이가 아닌 아이의 삶. 그는 나를 아이로 만들었고, 때때로 그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늘 어른이던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리고 잘 놀아주던 그.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도, 싫은데 좋은 척해야 할 필요도,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나는 나였다.

좌절된 소망을 생각한다. 찬과 닿고 싶은 마음. 뜨끈뜨끈하고 단단하고 커다랗던 찬. 우리의 단편적인 대화는 그마저도 쉽게 끊겼지만, 그를 만지는 게 너무 좋고 포근했다. 건조하고 아늑했다.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쉬고 싶었다. 불을 끄고 나서야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약간은 비슷한 사람이 되었다. 해가 떠오르면 서로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거슬려했다. 다행히 그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그는 곧잘 사과하고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바뀌겠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별 변화 없는 게 다시 불만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불을 끄면 따뜻한 몸집만 남았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평화롭고 향기로웠다. 그 즐거움은 많은 걸 요했지만 늘 감수했고 택했다. 누가 뭐라 해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몸서리칠 정도로, 내 존재를 잊도록, 좋았다.

내 옆에 평생 있겠다고 했잖아. 죽을 때까지 매일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했잖아.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와 평화롭게 행복한 낮 시간을 보내는 건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밤의 따뜻함이 너무 커서 낮에도 행복한 우리를 여러 번 그렸던 것 같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전혀 수긍 안 되는 상대의 말을 따라야 하는 일이. 애초에 수긍이 안 되는 걸 왜 수긍하는 척했던 건지, 거의 모든 시작점이 나와는 달랐다. 당연히 문제를 푸는 방식도, 방향도 달랐다. 그는 나의 방식을 고지식하고 어렵다고 느꼈겠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알려주지도 못했다. 방식을 알려주는 방식도 달랐을 것이다. 방식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연애의 오답 노트는, 좋은 건 좋은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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