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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

도르_도르 2021. 2. 25. 16:03


2016년에 재개봉했구나! 포스터가 귀엽다.

210225 jeudi

20대 초반에 두어 번 봤다. 최근 방송에서 어떤 유명인이 이 영화를 좋아한다 말했을 때 찬은 내게 "저 영화 봤어?"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다음에는 찬과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나 혼자 끝까지 다 봐 버렸네. 혼자 점심을 먹으며 보기 편한 영화였다. 찬과 이 영화를 같이 보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찬은 로맨스물을 좋아하지도 않으니, 섭섭할 리 없는 그에게 위로를 건넬 필요는 없다.

처음에 등장하는 샐리 친구의 애인인 해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을 자꾸 잊는다. 심지어 영화를 볼 때마다 그랬다. 멕 라이언('멕'이라고 쓰는 줄 처음 알았다)의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예쁘고 깜찍한 외모에 비해 해리 역의 빌리 크리스탈은 너무도 평범하다. 근황이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오늘 날짜로 1948년 생인 그는 무려 72세이다! 하긴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절에 개봉된 영화의 배우가 나이 든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나도 벌써 30대에 들어섰으니까. 참, 인생은 너무 짧다. 멕 라이언의 현재 모습은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로도 충분했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리와 샐리는 총 세 번의 만남을 가지는데, 세 번째 만남에서야 친구가 된다. 그들은 아주 달라서 첫 만남 때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삐걱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친구가 된 그들은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도 깊이 있게 알게 된다. 누군가를 잘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힘든 것처럼,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친한 친구 가면을 쓰고 각자 데이트하고 그걸 또 신경 쓰는 사이로 질질 끌다가, 마침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하여 초고속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 엔딩을 맞는다. 엔딩을 밝혔지만 스포가 아닌 것은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그들이 이뤄질 걸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서 겨울이 어울리는 영화였다. 친구였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연인이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쯤 이 영화를 같이 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결혼에 대한 구태의연한 인식이나 성 역할 고정관념이 정석으로 드러난 건 아쉬웠다. 남자인 해리는 단순하고, 성적으로 개방적이며, 회피적인 성향이 있다. 반면, 여자인 샐리는 복잡하고,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강박적인 성향으로 그렸다. 샐리는 남자는 그렇지 않지만 여자가 나이 드는 것은 결혼하기 불리해지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진 연인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귀인하기도 한다. 샐리의 또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 않을 때도 결혼을 못할까봐 전전긍긍한다. 고학력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근사한 직업에, 외모도 멋지고, 뉴욕에 아파트까지 있는데, 32세라는 이유로 결혼을 못할까봐 슬퍼하는 샐리에게 종종 이입이 깨졌다(결혼 안하면 왜...?). 싸우거나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의 결합은 목맬 가치가 있는 대단한 일이며, 그러니 우리 모두 목맵시다, 이런 느낌. 해리와 샐리는 그런 성 고정관념의 화신들이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존중함은 물론 어떤 문제이든 대화해 나갈 수 있는, 최상의 관계가 되어 결합했다. 그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사랑의 본질을 보여준다.

화르르 타오르다가 꺼지는 불 같은 사랑이 아닌, 오래도록 곁에 있으면서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신경 쓰는 사랑. 열정과 사랑이 아직 헷갈리는 나는 그런 사랑은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연애는 다른 관계들보다 훨씬 특별해야 한다는 비합리적 신념도 못 버리겠고. 머리로는 아무튼 알지. 이 영화는 머리를 때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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