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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230625 dimanche

도르_도르 2023. 6. 26. 18:21

뚜벅뚜벅 축제를 아시나요,,★

 

어제 태블릿으로 일기를 쓰다 잤는데 아쉽게도 휴대폰과 연동이 되지 않아 내용을 확인하거나 어디에 올릴 수 없다. 쓰면서 쿡쿡 혼자 웃을 정도로 재미있는 내용이었는데, 유감이다. 다행히 지금 사무실이 널널해서 약간 끄적여본다. 2박 3일을 C와 보냈다. 뭐든 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혹은 하기 싫어질까 봐, 심지어는 그를 떠나야 할까 봐 불안했다. 같은 문제가 닥친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설 작정이었다.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지 않았으나 언제까지나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매도 먼저 맞는 심정으로 C를 호기롭게 집에 초대해 놓고 새벽 5시만 되면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에게 안전함과 안정감을 벌써부터 느끼는 것 또한 생경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어디까지가 투사이고 어디에서부터는 사실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데면데면하게 굴었고, 둘이 남았을 때 드디어 손을 잡았다. C가 데려간 숲 속의 카페에는 손님이 우리뿐이었다. 그에게 기대어 있으니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건지 C의 것인지 헷갈렸다. 그는 뚝딱이다가 능숙하다가 했다. 분명 어설프고 우스웠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도 빼지 않았다. 뽀송뽀송하게 막 마른 천이 금방 젖었다. 땀이 후두두 떨어져서 비를 맞는 줄 알았다. 평소라면 찝찝해서 못 견뎠을 것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C가 입 대고 물을 마셔도 괜찮아서 그러라고 권했다. 다른 것보다 그가 편하게 있기를 가장 바랐다. 그는 곧장 일어나 씻으러 가야 한다고 엄포를 놓지 않았다. 무엇이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 겪지 못한 일이었다. C를 실수로 쳐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할 필요 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까지 미안할 행동을 한 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화내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사과하는 게 습관이 된 터였다. 찬이 남긴 건 그런 것이었다. C는 원래 이렇게 어지럼증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원래의 나를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입만 맞췄는데도 너무 어지러워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C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로 염려되었을 것이다. 이전 연애의 폐해를 들은 C는 믿을 수 없어했다. 그 순간이 바로 북한에 살다가 스마트폰과 상식이 통용되는 남한으로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긴 연애를 했냐는 C의 말은 종종 다시 떠올랐지만.

 

나는 C와 손도 잡기 전부터 같이 살아야지, 가족한테 소개해 줘야지, 라는 지금-여기와 아주 먼 지점에 가 있었다. 말을 놓은 다음 C가 기분이 어떤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결혼 생각이 있는지를 질문하였고 대답을 안 들은 채 지금 내 기분은 그와 결혼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에게 결혼 관련 의사를 듣지 않은 채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난생처음이었다. C와 남은 인생을 몽땅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곧 내뱉은 말을 검열했다. 상상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진짜 하자는 말은 아니자고 덧붙였다. 그는 뜬금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벌써요?”라는 내 대답을 이미 예상했다고 말했다. 궁금한 게 생각날 때마다 전부 물어댔다. 애정 표현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내가 어떻게 예쁜지,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는지, 욕심이 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앞으로 나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모든 대답을 다해 주었다. 심지어 예전 연애에 대해서도 (중간중간에 현타를 느끼면서)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관심을 둘 시간과 에너지가 없을 때가 있었으나 그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배려심이 분에 겨워 코끝이 찡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진심으로 위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C는 나랑 함께 살면서 매일 이렇게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은 둘째치고 진짜 같이 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나만큼 그도 진심인 것 같아서 우리 둘 다 미쳤다고 칭했으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연애를 꾸준히 하며 비혼 신념만 키워왔다. 그런데 C와 있으니까 결혼하고 평생 한 사람에게 충실하고 아이를 키우는, 평소에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을 갑자기 다 해치울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연인 사이에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기준이 나보다 더 빡빡한 C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의 논리가 이해되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어 행복했다. 우리는 다음 날 처음 가 본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같은 책의 같은 단락을 각자 읽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를 함께 봐주었고, 작품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듣는 데에 막힘이 없었고, 좋은 곳에 같이 가고 싶어 했고, 일상과 이벤트 모두를 나누고 싶어 했다. 일하는 중에 내가 알짱거리거나 실수해도 전혀 귀찮은 기색 없이 미소 지으며 들여다봐 주었다. 나와 접촉하고 이어지고 싶어 했다. 나의 밑바탕에 견고하게 자리한 개인주의에 균열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나를 뭐든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한 것뿐인데, 뭐든지 혼자 감당하는 게 당연했던 나에게 우리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는 C를 보며 뇌의 개발되지 않은 영역이 확장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말이 됐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이 물결이 익숙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신중하고 관계를 꾸리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도 만난 지 일주일 된 남자친구한테 속에 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편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C에게는 이상하게도 뭘 감출 필요가 없게 느껴졌다. 최소 2년을 쌓아야 하는 신뢰가 단 며칠 만에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전 연애의 소회(“이제 전 애인에 대해 말하기 싫다.”는 말까지 함. 하지만 또 말하고 말았다.)나 현재의 불안감(“이렇게 좋다가 팍 식을까 봐 걱정된다.”)까지도 이야기해 버렸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가 내 존재 자체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기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뭘 알까,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반해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크게 느꼈고, 기원했던 그대로를 이뤘다. 아직 콩깍지다 투사다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밖에 못 느끼는 이러한 연애 초기의 몽글몽글한 감정을 소중하고 감사히 여기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새롭고 짜릿하지만 안정감과 친근함까지 동시에 오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보통 둘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좋은 관계인 건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두 사람의 팔자에도 없는 번쩍번쩍 전광석화 연애기, 이 글을 기다렸던 분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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