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경부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아니, 섹스도 안 하는데!
그를 만나면서 병원 갈 일이 종종 생겼다. 일단 자는 시간이 많이 늦어진 데다가, 나이가 있으니 노화 또한 가속화되었겠지. 병원에 가면 무조건 면역력이 떨어졌느니, 피곤해서 그렇다느니 쉽게 말했다. 피로는 나를 삼켰다. 증상은 약을 먹으면 괜찮아졌지만 몸은 전보다 확실히 나빠졌다. 정말인지 그를 탓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가 술담배를 끊고, 건강해지는 음식을 먹고, 퇴근 후 헬스장 입장을 습관으로 들인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텐데 안 하는 거니까. 밤늦게 그를 만나는 것도 스스로 사서 하는 고생이다. 안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버리고야 마는 온전한 나의 선택. 종종 퇴근길 지하철을 함께 탄 남자들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 사실 진짜 멋있는 건 찬이지만, 잠시 눈이 삐는 건 그들의 연인이 부러워서이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사랑하는 사람, 얼마나 좋을까? 찬은 11시 30분에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열 통의 전화를 때리고 나서야 그 시간에 겨우 일어났다. 오늘 밤엔 또 늦게 자고 싶어 하겠지. 뻔한 일상이다. 나에게 늦은 시각이 그에겐 아니다.
간만에 연락 온 아버지의 심리사 자격증 이야기도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난 똘똘한 아이였던 거 같은데, 그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발달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 컸을 땐 남들도 나만큼 커 있었다. 그냥 평범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한 딸이 벌써 30대가 되었으니 아버지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뭘 위해서 사는지 전혀 모르실 것이다. 나에게 어떤 기대나 성취를 바라시기에는 들인 값도 크지 않고 중간중간의 결과물도 너무 미약하지 않았나. 학점은 바닥을 기면서 졸업 학점을 못 채운 것도 모르고 졸업 준비를 하던 딸은 결국 시외버스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 서로 다른 지역을 한 학기 동안 통학했다. 대학원을 단번에 붙은 건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모르는 문제들뿐이라 외운 걸 끼워맞추는 식으로 답을 썼고, 면접 때 입은 치마는 너무 짧아 남사스러워서 벌써 버렸는 걸. 뭐, 사랑하니까 똑똑하고 뭔가 큰 일을 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사랑하면 잘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처럼. 내 마음이 커지면 자신만이 가득해져서 남의 것을 똑바로 보기 힘들다. 상대를 똑바로 보고 적절하게 대처해주는 것은 관계의 기본인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사랑이 너무 커서라니. 내 사랑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열심히 점검해야 하는 이유이다.
애인과 함께 군인이었던 사람이 혼인 신고한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군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을 용감하게 신고한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덮으려고 피해자와 애인까지 압박했다. 죽음도 불사할 만큼 분노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상담해야 할 때 나는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가해자와 회유한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다. 가슴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