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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10608 mardi 본문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자는 학용품을 산다. 그게 인생의 진리다. 그래서 퇴근길에 아무 문구점에나 들어갔다. 사장님은 모니터에서 뭘 보고 계시는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구매자들의 근사한 취향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듯 따분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은 그마저도 잘 안 보였다. 나는 도라에몽 가방에서 안경을 찾을 바에야 아주 가까이에서 학용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어차피 손님도 나뿐이었다. 목표는 노트 구입. 예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고 사용하는 모습이 상상 가지 않는 노트들 틈에서 내가 원하는 노트를 그려보았다. 새로 공부하는 내용들로 처음부터 끝까지 꽉 채워진 노트, 색색깔의 반듯한 글씨로 정리된 노트, 그 한 권만 들고 있으면 고사장에서 마음 든든한 노트, ... 하지만 펜을 들기도 전에 노트 사용 분량을 아는 수는 없다. 비닐 포장 때문이 내지를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쪼그려 앉기 십 분째에 식은땀이 나자, 에라, 모르겠다, 한 권을 골랐다.
어제 남은 배달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달콤한 게 당겨서 마트에 들렀다. 초코볼을 넣어 떠먹는 요거트와 과자 세 봉지를 챙겼다. 두 계산대 중에 줄이 짧은 곳에 섰다. 곧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근처에서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던 점원이 끼어들었다. 기존 결제 방식이나 구입 물건 수량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기다리다가 다른 계산대에 다시 줄을 섰다. 전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기다렸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도, 집에서 다른 할 일이 급한 것도 아니었지만, 현대인은 언제나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 한다. 내 판단대로 금방 차례가 다시 와서 계산을 마쳤고, 이제 그곳을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그 할머니는 저녁 7시인데도 썬캡을 쓰고 계셨다. 예외 없는 파마머리를 하고 점원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소통을 원하는 상대의 말을 안 들으시면서 누군가가 앞에서 뭐라고 설명해주는 것 자체로 소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묘했다. 지난번에 나를 기다리게 했던 분과 같은 사람인가? <You only live once> 노트 표지의 글자가 번뜩였다. 밀란 쿤데라는 한 번만 사는 것은 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토마시가 되뇌는 독일 속담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어가는 나이는 알고 있다. 점점 늙고 쇠약해지고 덤덤해지고 세상이 웃기지도 않은, 이렇게 계속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하다. 심지어 산전수전 다 겪고 생에서 최고의 나이가 됐을 때의 그 끝은 애초에 없었던 것과 같아지다니. 먹고살 만하다는 게 내 인생에도 있는 명제일까? 아니면 어차피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나? 아, 이사는 정말 큰 스트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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