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왕/잠류

딸에 대하여_김혜진

도르_도르 2025. 6. 13. 22:50

250503 samedi

 

오래전에 중고서점에서 샀고, 우연히 신혼여행지에 들고 간 책. 하드커버이지만 가볍다는 점이 책을 캐리어에 넣은 주요 요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을 읽(어야 하)던 중이라 다른 책들을 잘 못 보던 때였는데, 이 책을 챙김으로써 다시 독서 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악령 』과 ㅂ2한 것은 아쉬운 일이긴 하나, 다음 기회가 있겠지.

 

엄마가 화자로, 딸과 딸의 동성 연인과 동거하게 되면서 겪는 경험이 책 내용의 주를 이룬다. 엄마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에게도 타당한 이유와 나름의 사정이 있다. 나는 나와 성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할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지만, 그래도 화자의 마음이 와닿았다. 요양보호사인 화자와 시간 강사인 딸은 노동의 영역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화자는 순응하고 딸은 저항한다. 화자가 딸의 세계를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과 딸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딸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모습이 좋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화자가 느끼는 노화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들이 아주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두 분 모두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울적해하셨다. 나도 점점 흰머리가 나고 있다. 늙는다는 건 단순히 기능의 저하뿐만 아니라, 모든 게 약해진다고 뼈저리게 느끼면서 내면까지 약해지기 쉬운 과정이다. 그러나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p. 22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p. 95

왜 우리 때만 해도 안 그랬잖아요.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고 되면 고마워하고 그럴 줄 알았잖아요. 법 없이도 살았죠. 근데 요즘 사람들은 떼쓰고 억지 부릴 줄만 알아요. 저 아까운 시간을 저렇게 길에 다 내버리고 있다고요.

 

p. 96

이렇게 좋은 시절이 다 가 버렸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머무는 시간, 그리고 내가 보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너무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p. 114

이런 식으로 간단하고 간편하게 뭔가를 물리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뭔가와 맞서고 싫은 소리를 하고 매번 내 바닥이 어디인지 더듬어 확인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p. 129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